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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거래 의혹 수사, 직권남용 3대 쟁점이 유·무죄 가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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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호 04면

재판 거래 의혹 사건의 ‘키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6일부터 세 차례 소환조사를 받았다. 그는 혐의를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판 거래 의혹 사건의 ‘키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6일부터 세 차례 소환조사를 받았다. 그는 혐의를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협조” 입장 발표 후 4개월간 계속된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및 재판 거래 의혹(이하 ‘재판 거래 의혹’) 수사가 분수령(分水嶺)에 다다랐다. 그동안 제기된 모든 의혹에서 ‘집행자’로 지목돼 온 임종헌(59)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일 검찰에 네 번째 소환된다. 검찰은 주말 조사를 마친 뒤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할지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검찰이 그에게 어떤 진술을 받아내느냐에 따라 ‘윗선’인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수사가 탄력을 얻을 수도,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지위 이용한 재판 개입은 직권남용” #"문건 작성 자체가 직권남용 피해” # vs #"재판 개입 권한 없어 남용도 못 해” #“작성자 업무 기준·절차 위반 없어”

그동안 법원 진상조사와 검찰 수사로 부각된 의혹은 크게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거래 ▶기타 부적절한 행위 등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중 핵심인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재판 거래 의혹을 ‘범죄’로 구성하기 위해 검찰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직권남용죄(형법 123조)다. 이 수사에 4개 특수부 전체와 파견자를 포함해 50여 명의 검사를 투입한 서울중앙지검(검사장 윤석열)은 혐의 입증을 자신하지만 법조계에선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적혀 있는 직권남용죄의 성립 요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① 재판에 개입할 직권(직무권한)이 있나

임 전 차장의 공소사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재판 거래 의혹은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의 상고법원에 대한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의미가 큰 재판에 개입해 당시 여권에 유리한 결론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2015년 7월 작성된 ‘현안관련말씀자료’ 등의 문건에 등장하는 ▶과거사위원회 ▶원세훈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 해군기지 ▶휴일근로수당 중복 할증 사건 등 16가지와, 통합진보당 관련 사건 등 개별 문건에 등장하는 5~6가지 재판이 거래의 대상이 됐다고 의심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작성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방안’ 등에 상고법원에 대한 청와대의 동향과 대응 전략이 제시된 것과 맞물려 보면 재판 거래 ‘의혹’을 살 소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우선 대법원장이나 행정처 간부에게 일선 재판에 개입할 직무 권한이 있느냐가 쟁점이다. 직권남용죄는 ‘직권’이 있어야 ‘남용’도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KT나 현대자동차 등 민간 기업을 압박해 최순실씨의 광고회사 플레이그라운드에 일감을 몰아준 혐의에 대해 법원은 “강요죄는 성립하지만 직권남용은 무죄”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의 직무 권한을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민간 기업끼리 하는 거래에 개입할 권한은 없다는 이유였다.

헌법과 법원조직법 등에 따르면 대법원장은 인사·총무 등을 총괄하는 사법행정의 우두머리지만 하급심 재판에 개입할 권한은 없다. 오히려 재판의 독립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대법원장의 참모일 뿐이다. 검찰이 임 전 차장 등이 “재판에 개입했다”고 기소한다면 재판에선 임 전 차장 등이 해당 재판부에 전화나 구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걸 입증할 수 있는지와 더불어 그런 행동이 겉보기에 직무권한 범위 내의 행동인지가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청와대에 선전할 재판들을 추렸다는 것 자체는 수치다. 하지만 (임 전 차장 등이) 설령 전화했더라도 그게 법조문상 직무권한의 행사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에 검사 출신인 한 로스쿨 교수는 “관료적 사법구조에서 행정사무와 재판사무의 경계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 재판에 개입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② ‘블랙리스트’는 실행됐나

‘사법부 블랙리스트’라고 불리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은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 비판적이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핵심 회원들의 동향을 파악해 인사에 불이익을 줬다는 내용이다. 법원 자체 진상조사 과정 등에서 김기영·송오섭 부장판사, 차성안·박노수 판사 등이 피해자로 거론됐다. 김 부장판사는 2015년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를 통치행위로 인정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부정한 지 6개월도 안 돼 이를 정면으로 뒤집는 판결을 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한다. 박 판사는 국제인권법연구회원들의 지지를 받아 같은 해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차 판사는 겸직허가를 받지 않고 시사주간지에 다섯 차례 기고했다는 이유로 동향 파악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송 부장판사는 2016년 2월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법관의 사법행정 참여 제도화에 관한 건의문’을 올린 뒤 법원행정처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하는 가장 선명한 방법은 리스트에 오른 판사들이 권리행사를 방해받았다는 결과를 입증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인사조처 결과는 정반대였다. 김 부장판사는 징계를 피했고 여당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이 됐다. 박 판사는 그 선거에서 당선돼 임기를 마친 뒤 본인 희망대로 남원지원장 발령을 받았다. 송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의 핵심 보직인 양형위원회 운영지원단장으로 발탁했다. 차 판사가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흔적도 없다.

③ 문건 작성자=피해자?

검찰에는 심의관(평판사)들에게 부적절한 기획 문건들을 작성하게 한 것 자체를 직권남용으로 보아 기소하는 방법이 더 수월한 길일 수 있다. 현재 서울중앙지검과 지휘라인이 같았던 국정농단 특검팀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기소할 때 쓴 방법이다. 블랙리스트의 실질적 피해자는 문예진흥기금 등 지원에서 배제된 예술인들이었지만 특검팀은 ‘법률적 피해자’를 김기춘 전 실장에서 시작된 부당한 압력에 굴복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독립기관의 실무자라고 파악했다. 예술인들은 100% 보장된 지원금을 못 받은 게 아니라 경쟁에서 배제됐을 뿐이어서 확정된 권리가 침해됐다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심의관들을 피해자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쟁점은 과연 기획문건 작성이 심의관 고유의 권한과 역할, 정해진 업무 기준과 절차를 위반한 것이냐다. 법조계의 의견은 엇갈린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공작 기획을 방불케 하는 문건을 작성한 것은 정책기획·연구·평가 등 심의관의 정상적 업무 궤도를 이탈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심의관은 판사라기보다 상관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는 공무원일 뿐이다. 업무에 특별한 기준과 절차가 있지도 않다. 내부 검토용에 그쳤다면 문건을 작성케 한 것을 직권 남용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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