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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살고 싶은 이유, 배다리 대폿집의 작은 신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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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호 21면

 박찬일의 음식만행(飮食萬行) 인천 배다리 ‘개코막걸리’

인천의 노포 개코막걸리의 주인이 바뀌었다. 옛 주인이 장사를 못하자 단골이 물려 받았다. 작은 신화가 이렇게 다시 이어졌다. 김경빈 기자

인천의 노포 개코막걸리의 주인이 바뀌었다. 옛 주인이 장사를 못하자 단골이 물려 받았다. 작은 신화가 이렇게 다시 이어졌다. 김경빈 기자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은퇴하면 인천 가서 살 거야.” 아내는 의아해한다. 서울내기인 내가 왜 인천인가. 이유를 물을 때마다 “옛날식 집도 살아 있고, 소박한 골목도 있고. 서울은 그럼 모습이 없잖아”라고 말했다. 그렇긴 하다.

인천 동구 ‘개코막걸리’ #헌책방 많았던 오래된 동네 배다리 #문화단체가 개발 막고 전통 지켜내 #손맛은 주인아줌마, 입담은 아저씨 #주인아줌마 교통사고로 가게 닫자 #터줏대감 연극인 김병균씨가 이어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배다리의 ‘개코막걸리’다. ‘있(었)다’고 쓴 까닭은 그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정길(74) 금정숙(71) 부부가 운영하던 이 집은 과거형이 되었다. 지역민의 사랑을 받던 하나의 전설이 사라졌다. 놀라운 건, 그 집이 이제 새 주인에 의해, 그것도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단골에 의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개코막걸리의 옛날 모습. 겉모습은 낡았지만, 내부는 인천을 사랑하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정겨웠다. [사진 나비날다]

개코막걸리의 옛날 모습. 겉모습은 낡았지만, 내부는 인천을 사랑하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정겨웠다. [사진 나비날다]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 도원역에서 종착점인 동인천역으로 가는 철교를 옆에 두고 발달한 서민 동네. 한때 이곳은 인천의 교육을 책임지는 지역이었다.

“옆으로 창영학교, 영화학교, 선화학교, 동산고교…, 학교가 진짜 많았지. 이 동네에서 콘사이스 한 권 사러 오지 않은 인천 학생은 없었을 거야. 바글바글했지.”

주인 신씨의 기억이다. 콘사이스란 휴대용으로 작게 만든 사전류로, 학생들이 휴대하고 다녔다. 배다리에만 20곳이 넘는 헌책방이 있었다.

“배다리는 일제강점기부터 인천의 서민이 모여 산 동네였어요. 시장이 열렸고, 인천의 중심부를 떠받치는 주거지역 역할도 했지요. 나중에는 문화인이 이곳을 사랑해서 많이들 왔어요.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가는 인천에서 그나마 살아 있는 근대역사 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목공예사와 수제 구둣방도 인기가 있었지요.”
마침 현장에 나온 인근 화도진도서관 사서 박현주 선생(56)의 설명이다.

배다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설이 분분한데, 작은 배가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골 수로를 통해 철교 밑까지 드나들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옛 행정구역은 인천시 동구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다. 개항장이 있는 동인천 근처가 일본인에 의해 크게 번성했고, 조선인은 이곳으로 몰려들어 살았다.

1915년 2월 14일자 ‘매일신보’는 배다리마을이 온갖 물산이 넘쳐나고 한번 들어가면 연락이 두절될 만큼 사람이 많고 번성했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천 사람의 배다리 사랑은 유별나다. 특히 지역의 젊은 문화인을 중심으로 배다리의 전통을 유지하고 살리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의 행정당국은 여러 차례 이곳을 ‘개발’하려고 했고, 그때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나마 인천다운 인천이 있는 배다리를 지켜야 한다는 토박이의 반대가 드셌다. 옛 양조장 터에 자리 잡은 문화운동 공동체 ‘스페이스빔’을 중심으로 여전히 그 기세가 살아 있다.

배다리는 서울 사람에게 헌책방 골목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 ‘도깨비’의 현장으로 등장하면서 주말이면 젊은이가 몰려들기도 했다. 물론 잠깐의 붐이었지만.

개코막걸리의 옛날 주인과 지금 주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옛 주인 신정길(오른쪽) 금정숙(왼쪽) 부부와 지금 주인 김병균씨. 김경빈 기자

개코막걸리의 옛날 주인과 지금 주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옛 주인 신정길(오른쪽) 금정숙(왼쪽) 부부와 지금 주인 김병균씨. 김경빈 기자

“배다리를 지키려는 사람들, 인천의 마지막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 이 집 개코막걸리였지요.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서로 존재를 확인하고, 배다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거죠.”

연극 극단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배다리를 보고 자라온 김병균씨의 말이다. 그는 이 자리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새로운 개코막걸리(보통 줄여서 ‘개코네’라고 부른다)의 새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옛 주인과 새 주인이 모였다. 정식으로 인천 시민에게 인수·인계를 선언한 셈이다.

개코막걸리는 배다리를 지켜온 산증인이다. 배다리가 아직 사람들로 흥청거리던 1987년 문을 열어 올봄까지 장사했다. 앞서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 않았던 대폿집이었다. 내 나름의 인천 투어 코스가 있다. 인천역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건너편 밴댕이 골목의 노포 술집 ‘수원집’에서 막걸리에 밴댕이회를 한잔한다. 슬슬 걸어서 신포시장을 넘어 배다리까지 넘어온다. 마을을 구경하며 헌책방들을 순례한다.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흥정해서 사고, 개코막걸리에 들러 그야말로 환상적인 안주에 막걸리를 마신다. 배가 고프면 인근의 ‘용화반점’이나 ‘문화반점’에서 볶음밥을 먹는다.

그런데 이 코스에 문제가 생겼다. 50년 역사의 수원집이 문을 닫았고, 개코막걸리까지 사라질 상황에 처했었다. 모두 지난해 가을에서 올봄까지의 일이다. 주인들이 연세가 들면서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지자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 것이다. 개코막걸리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은 건 충격이었다. 내가 인천에 가는 중요한 이유가 사라진 게 아닌가. 전화를 걸어봐도 불통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럴 즈음,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이곳의 단골들이 가게를 인수해 재개업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수고대 끝에 마침내 문을 열었다.

“개코막걸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주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몇 달간 문을 닫았었거든요. 다친 팔이 쉬이 낫지 않아서 당분간 못한다, 이런 말은 들었지만 완전히 접는다고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었어요.”

배다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개코막걸리가 언젠가 문 닫는다는 건 예정된 일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주인 내외가 더 연로하면 결국 사라지겠지, 하는. 그러나 그 순간이 더 빨리 찾아왔다. 아주머니의 사고였다.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개코네는 없어지면 안 된다, 이런 의무감이랄까.”
김병균씨가 나섰다. 정식으로 계약하고 가게 내부를 손봤다. 오랫동안 지역민이 사랑방처럼 쓰던 개코막걸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옛날 개코막걸리의 내부 풍경. 온갖 사진과 그림이 걸려 있는 벽면이 배다리 문화예술인의 사랑방다운 모습이다. [사진 나비날다]

옛날 개코막걸리의 내부 풍경. 온갖 사진과 그림이 걸려 있는 벽면이 배다리 문화예술인의 사랑방다운 모습이다. [사진 나비날다]

개코막걸리에는 두 가지 명물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끝내주는 음식 솜씨, 다른 하나는 아저씨의 입담이었다. 홀 서빙을 보면서 손님과 이런저런 농담으로 자리를 빛낸 아저씨였다. 그는 처음 오는 손님이 있으면 반드시 꺼내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나도 그 레퍼토리를 들으면서 단골이 되었다.

“이 집 이름이 왜 개코막걸리가 됐냐면….”
사연인즉 이렇다. 원래 이곳은 ‘디즈니분식’이라는 이름의 밥집이었다. 가게 간판에도  ‘구 디즈니분식’이라고 쓰여 있다. 주인 내외가 밥집으로 아주 바빴다. 근처에 있는 여러 학교에 밥을 배달하면서 유명해졌다. 옛날에는 선생님들이 학교로 밥을 배달시켜 먹었다. 주로 중국집이었는데, 한식 배달을 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 마침 이 집 음식 솜씨가 알려지면서 주문이 쏟아졌다. 야구 선수 류현진이 나와서 유명해진 창영초등학교(그는 쭉 이 동네에서 학교에 다녀 동산고를 졸업하고 프로선수가 됐다)도 주요 고객이었다.

“밥을 담아서 통에 싣고 열심히 배달했지. 맛이 좋아서 아주 인기가 있었어요. 아내가 맛있게 했거든. 그러다가 학생 숫자가 줄고 점차 밥집 노릇이 줄면서 막걸리 집이 된 거야. 이 동네에 예술인이랑 인천 토박이가 많았는데, 우리 집에 몰려와 막걸리 마시면서 다시 바빠졌지.”

디즈니분식이란 이름은 우연히 개코막걸리로 바꿔 달게 됐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동물의 왕국’을 하는 거야. 거기 개코원숭이가 나오더라고. 그 이름이 좋아서 상호를 바꿨지. 어때 좋지?”
그가 새로운 손님에게 들려주는 그 레퍼토리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러면 부엌에서 열심히 안주를 만들던 안주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아, 손님들 귀찮게 하지 마세욧!”

지금 개코막걸리의 대표 메뉴라 할 수 있는 바지락볶음. 김경빈 기자

지금 개코막걸리의 대표 메뉴라 할 수 있는 바지락볶음. 김경빈 기자

개코막걸리는 정말 안주 맛이 하나같이 좋았다. 인심 좋게 커다란 전과 민물새우탕(이건 정말 꿀맛이었다), 비지찌개, 가오리찜과 인천 명물인 박대구이…. 무엇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손맛이 기가 막혔다. 이제 새로운 주인 김병균씨가 요리한다. 옛 안주는 사라졌지만, 가지볶음이며 바지락볶음 같은 새 시대의 안주가 등장한다. 꽤 맛이 좋다. 막걸리도 늘 나오던 인천 고유의 ‘소성막걸리’ 말고도 ‘해창막걸리’ 같은 장안의 인기 제품도 갖춰놓았다. 그래도 상호는 여전히 개코막걸리다. 전 주인으로부터 정식으로 상호 인계가 된 셈이다.

인천의 배고픈 예술인과 청년의 아지트였던 개코막걸리의 작은 신화는 이렇게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박찬일 chanilpark@naver.com
글 잘 쓰는 요리사. ‘로칸다 몽로’ ‘광화문 국밥’ 등을 운영하며 음식 관련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본인은 ‘한국 식재료로 서양요리 만드는 붐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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