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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편집국장레터]마케도니아가 만든 가짜뉴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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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호 면

“문제는 소셜미디어의 확산이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의견이 정보보다 더 많이 공유되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어떤 관점을 가진 의견이 팩트에 기반한 정보보다 훨씬 더 공유된다. 나는 이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공유되는 의견의 형태는 드라마틱 하거나 분노를 일으킬만한 것들인 반면, 가장 덜 공유되는 형태의 정보는 균형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신중한 정보이기 때문이다”(슬로우뉴스 2017년 11월13일 보도)

"가짜뉴스 많다"가 가짜뉴스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가짜뉴스 많다"가 가짜뉴스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VIP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영국 가디언의 캐서린 바이너 편집국장이 지난해 가짜뉴스와 관련해 했던 인터뷰 기사로 레터를 시작합니다. ‘팩트보다 의견을 사람들이 더 많이 공유한다’는 발언에는 레거시미디어 종사자들의 슬픈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가짜뉴스가 확산되는 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겨레신문 보도에 이은 정부의 대책 발표 등으로 가짜뉴스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논쟁의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가짜뉴스를 법이나 행정의 힘으로 없앨 수 있는지가 하나고, 가짜뉴스를 누가 어떻게 판별하느냐가 또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해 가짜뉴스를 법이나 행정의 힘으로 없앨 수 있다는 명제는 사실이 아닙니다.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됩니다.

2016년 미국 대선의 승자는 트럼프였습니다. 그 트럼프의 당선을 도운 공신들 중 하나는 나중에 밝혀졌지만 워싱턴에서 7900km 떨어진 마케도니아의 10대, 20대들이었습니다. 대선 후 AP, 가디언 등이 추적한 결과 SNS상에서 친 트럼프 성향 뉴스의 진원지가 발칸반도 동북쪽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인구 5만5000명의 소도시 벨레즈였다는 겁니다. 벨레즈의 10대,20대들은 하루종일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통해 미국 극우파 보수 성향의 블로그를 뒤지며 가짜뉴스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힐러리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말했다”거나 “로버트 드 니로가 트럼프 지지로 돌아서 할리우드가 충격에 빠졌다”는 게 이들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가짜뉴스들입니다. 당시 미국 대선과 아무 관계가 없었던 마케도니아의 청년들은 돈을 위해 가짜뉴스를 만들었습니다. 온라인과 SNS에서 클릭 수가 높은 콘텐츠엔 광고가 붙기 때문입니다. 벨레즈 청년들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올리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 뉴스들을 퍼트리는 형태였습니다. AP뉴스의 취재에 등장한 벨레즈의 한 청년은 “진짜뉴스인지, 가짜뉴스인지 저는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뉴스를 읽으면, 저는 돈을 벌면 돼요. 하루에 230만~280만 원 정도 벌어요”라고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벨레즈 시장은 “가짜뉴스는 마케도니아에서 불법이 아닙니다. 정치판에서 도덕적인 것은 없습니다”라고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뉴스가 방송이나 신문만을 통해 전달되던 시대에서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타고 국경도 없이 전달되는 오늘날 가짜뉴스를 막겠다는 건 그물로 바닷물을 잡겠다는 얘기입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재미를 본 마케도니아 청년들은 이제 2020년 미국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CNN 때려눕히는 트럼프   (워싱턴=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가짜뉴스'라며 미국 CNN방송을 들어 메치는 패러디 영상을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사진은 영상의 한 장면.

CNN 때려눕히는 트럼프 (워싱턴=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가짜뉴스'라며 미국 CNN방송을 들어 메치는 패러디 영상을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사진은 영상의 한 장면.

가짜뉴스를 누가 판별하느냐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박상기 법무장관은 가짜뉴스 논쟁이 일자 16일 검찰에 수사 지시를 내렸습니다. 박 장관은 허위조작정보 사범이 발생할 경우 초기단계부터 신속하게 엄정한 수사체계를 구축해 배후 제작자나 유포자를 추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정보의 허위성이 명백하고 사안이 중대하면 고소ㆍ고발 전에라도 수사에 착수하라고 했습니다. 가짜뉴스와의 전쟁은 이 정부가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해 2월28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는 국무회의에서 “최근 국내외에서 가짜뉴스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며 “미래부, 경찰청 등 관계기관에서는 모니터링과 단속을 강화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가짜뉴스가 사실보다 의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속성을 감안하면 단속자의 주관이나 단속을 지시한 사람의 정치적 편향에 따라 단속대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제되는 가짜뉴스가 극우 사이트를 온상으로 한 것이라면, 박근혜 정부에서 주로 단속하거나 규제한 가짜뉴스들은 극우 사이트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도 따지고 보면 정치적 편향을 담은 행정권의 남용이 불러온 잘못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면 안됩니다.

공교롭게도 가짜뉴스로 커다란 이득을 본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CNN 등 미국의 주류언론들을 상대로 “가짜뉴스의 온상지”라고 몰아부치고 있지 않습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정부의 간섭보다 수만 배 소중한 가치입니다. ‘신문 없는 정부 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명제는 가짜뉴스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가짜뉴스 대응책에 민주언론시민연합,언론개혁시민연대,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시민단체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선 것도 그래서입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가짜뉴스 허위조작정보 어떻게 할 것인가'토론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뉴스1]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가짜뉴스 허위조작정보 어떻게 할 것인가'토론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뉴스1]

논쟁과 대책은 가짜뉴스보다 진짜뉴스, 편견보다 객관적인 사실ㆍ논평이 웃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쪽으로 선회해야 합니다. 행정부의 선의에 기댄 해법 보다 언론과 기업의 자정 기능을 우선하는 팩트체크 해법이 역사적으로 더 건강합니다. 정부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는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 봅니다. 법의 집행이 공정하고 공평하다면 처벌의 강도는 단호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면 교통경찰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위반으로 단속되면 벌금이 센 데다, 감히 항의라도 할라치면 티켓(과태료 통지서) 서너 장은 더 받을 수 있다는 공권력의 힘 때문입니다. 가짜뉴스로 명백하게 피해 입은 사람이 민사소송을 했을 때 가해자에게 중한 판결을 내려 지켜보는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가까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건 중요합니다.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뉴스 시장이 건강해야 합니다. 정파에 치우친 자극적인 가짜뉴스보다 미래지향적이고 건강한 논쟁을 부르는 진짜뉴스를 소비하는 습관이 사회를 건강하게 합니다.

지난 주 중앙SUNDAY는 스마트폰 시대를 역행하는 학교 안의 명상 교육을 스페셜리포트로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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