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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크 정비공 출신 레이서, 바하랠리 1위 골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상원의 소소리더십(32)

작년 10월 21일 자 칼럼에서 인터뷰했던 정주영 사진작가가 며칠 전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엊그제 류명걸 프로가 바하랠리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어요.”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인 경주대회 '바하랠리' 클래스 1에서 우승한 프로레이서 류명걸 선수. [사진 정주영 작가]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인 경주대회 '바하랠리' 클래스 1에서 우승한 프로레이서 류명걸 선수. [사진 정주영 작가]

미안한 얘기지만 정 작가의 흥분을 충분히 공감할 수 없었다. 류명걸이라는 이름도, 바하랠리라는 대회명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데요?”라고 대꾸할 수 없는 노릇. 이럴 때는 괜히 아는 척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낫다. “아~ 그래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눈치를 챘는지 말을 자르며 정 작가가 덧붙인다.

듣고 나니 더욱 난감했다. 오토바이 대회는커녕, 오토바이를 타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설기는 하더라도 정 작가가 호들갑을 떠는 통에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제가 잘 몰라서요. 대회 설명과 선수 프로필 좀 보내주세요. (자료를 받아보고 조금 놀라서 바로 연락했다) 류 선수랑 멕시코에서 언제 귀국하죠? 시간 맞춰 인터뷰하죠.”

오토바이 정비공 출신이 ‘바하랠리 클래스 1’ 우승

먼저 ‘2020년 다카르랠리 완주를 목표로 시험 삼아 출전한 바하랠리’라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다카르랠리’는 들어본 적이 있다. 20여 년 전 허영만 원작의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카레이서(정우성 분)가 참가했던 어렵기로 악명 높은 세계 최고의 대회다. 워낙 악조건에서 열려 완주만 해도 자동차의 성능과 레이서의 능력을 최고로 쳐 주기 때문에 세계적인 제조회사와 선수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다.

바하랠리 입상자들과 함께.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류명걸 선수다. [사진 정주영 작가]

바하랠리 입상자들과 함께.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류명걸 선수다. [사진 정주영 작가]

자동차뿐만 아니라 바이크 경주도 함께 열린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바하랠리는 다카르랠리보다 50년 정도 역사가 앞서 있는, 다카르랠리와는 다른 측면에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대회라고 한다.

류명걸(38) 선수가 오토바이 정비공 출신이라는 사실이 더 큰 관심을 끌었다. 세계적인 선수는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유명한 회사로부터 후원을 받기 때문에 대회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류 선수는 정비공으로 시작해 취미로 바이크를 타기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쉽게 말해 야구용품점에서 장비를 고치고 판매하는 야구동호인이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거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셈이 아닌가.

바하랠리 레이싱 중 우연히 멕시코 해변에서 일몰을 맞이하고 있는 류명걸 선수. 이때 다카르랠리를 꿈꾸며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사진 정주영 작가]

바하랠리 레이싱 중 우연히 멕시코 해변에서 일몰을 맞이하고 있는 류명걸 선수. 이때 다카르랠리를 꿈꾸며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사진 정주영 작가]

먼저 세계적인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을 축하드립니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바이크 대회도 온로드와 오프로드로 나뉩니다. 경기장을 도는 것과 산악·사막 등에서 타는 차이죠. 유명한 오프로드 대회가 다카르랠리와 바하랠리입니다. 저는 이번에 바하랠리 클래스 1에서 우승, 종합순위로는 8위를 차지했습니다. 저를 제외한 우승자나 입상자들은 거의 대기업에서 후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선수생활을 하는 유명한 프로입니다. 무명의 동양인 정비공이라 큰 관심을 받고 있죠.
프로 바이크 선수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데요. 다른 직업 없이 전문적으로 바이크 대회만 출전하는 건지.
네, 2007년부터 올 2월까지 오토바이 제조회사의 인증팀, 부품팀, 영업팀에서 근무했고요. 지금은 전문적으로 바이크 대회에 출전만 하는 한국인 최초의 랠리스트입니다. 2020년 다카르랠리에 참가해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바하랠리에는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그에 맞춰 준비하기 위해 출전했는데 우승까지 해 기분도 좋고 자신감도 커졌습니다.
오토바이 제조 회사의 부품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류명걸 선수. [사진 류명걸]

오토바이 제조 회사의 부품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류명걸 선수. [사진 류명걸]

어떤 계기로 바이크 선수가 되신 건가요.
고등학생 때 친구 바이크를 빌려 탔는데 고장이 났어요. 직접 정비소를 알아보고 정비소 일을 도와주며 내가 직접 고쳐줬죠. 공업고등학교에 다녀 정비 기초는 알고 있었거든요. 이 계기로 정비소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정비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 정식으로 정비공이 되었습니다.

제대 후 오토바이 제조회사에 정식으로 입사해 일하며 바이크를 탔습니다. 고객의 마음을 알면 일하는 데도 도움이 되니까요. 본격적으로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재미가 커지니까 잘 타고 싶고요.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선수가 된 거죠.

선수가 되고 난 후 성적은 어땠나요.
2007년 국내대회 가장 높은 클래스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011년 태국 ‘투데이스 앤듀로(Two Days Enduro)’대회에서 우승하고, 작년에는 몽골랠리에서 우승했지요. 몽골랠리는 태국랠리와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대회입니다. 이때부터 레이서들의 꿈인 다카르랠리에 참가해 완주할 목표를 세웠습니다. 2016년 몽골랠리 우승자가 다카르랠리 완주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감이 생겼지요. 저는 2020년에 참가해서 완주할 계획입니다.
바이크 선수 된 후 각종 국제대회 휩쓸어

2007년 국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을 때 시상대에 선 류명걸 선수. [사진 류명걸]

2007년 국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을 때 시상대에 선 류명걸 선수. [사진 류명걸]

10년 전부터 국내대회를 휩쓸고 최근엔 아시아 대회와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프로 레이서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나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선 아직 바이크 프로레이서에 대한 인식이 낮아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퇴사하고 나서 사는 전셋집을 월세로 바꾸면서 나름대로 자비로 준비해 오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죠. 이번 바하랠리에 참가할 때 바이크도 미국에서 렌탈해 간 겁니다. 우리나라 봅슬레이 대표팀도 처음에는 썰매를 빌려 대회 참가했지요. 제게는 남 얘기가 아닙니다.
세계대회 참가는 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바하랠리는 어떻게 참가했나요.
대회 참가 비용 일부는 내가 부담했지만, 주위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기업체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료 화면 이 중요할 것 같아 던컴닷컴의 정주영 작가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무료로 도와주었고요. 아는 교수도 무료로 통역 자원봉사를 맡아주었습니다. 대회 준비부터 우승까지 스토리는 곧 공중파에서 방영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멕시코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류명걸 선수. [사진 정주영 작가]

멕시코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류명걸 선수. [사진 정주영 작가]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일단 2020년 다카르랠리에 참가해 한국인 바이크 선수 최초로 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로레이서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고 있는 만큼 후배들은 저보다 나은 환경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이크가 프로스포츠로 인정받아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등 좋은 인프라를 갖추고 종국에는 모터사이클 시장이 확대돼 제조회사와 레이서간의 협업으로 산업화를 이루는 데 일조하는 것입니다.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몸이 전부다』 저자 jycys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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