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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 은행 개성공단 지점 내나" 美 차관 전화 저승사자 같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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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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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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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은행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지난달 “대북제재 준수”를 요청해온 전화 때문이다. 정부는 그제 국정감사에서 “미 재무부의 통상적인 활동”이라며 “미국 측의 오해가 풀렸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다음은 해당 은행 임원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대북제재 지키라는 미 무력시위 #국제금융 모르는 좌익 모험주의 #청와대·정부가 북한 심기 살피다 #자칫 미국의 핵펀치 맞을지 몰라

지난달 19일 남북 평양 정상회담 무렵. 미 재무부가 7개 은행의 뉴욕 지점을 콕 찍어 e메일과 전화로 ‘미 재무부 차관이 서울 본점의 준법감시 책임자와 통화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해왔다. 산업·기업·국민·신한·농협·우리·하나 등 뉴욕 지점에서 실제 송금·이체·환전 등 거래를 하는 은행들이다. 수출입은행은 뉴욕에 사무소가 있지만 영업은 하지 않아 제외됐다.

미 재무부와의 회의는 지난달 20일에 4개 은행, 그 다음날 3개 은행과 진행됐다. 미국 측에서 유대계 억양이 짙은 여성과 중년 남성이 번갈아 나와 우리 쪽 부행장급 준법 책임자와 20분 정도씩 통화를 했다. 미 재무부의 시걸 맨델커 테러·금융정보담당 차관과 대니얼 모저 부차관보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올해 초부터 전 세계 금융기관에 “미국과 북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해온 주인공이다.

통화 내용은 무엇이었나.
“최근 은행장들이 문재인 정부에 코드를 맞추느라 남북경협 홍보에 열을 올린 게 사실이다. 미 재무부는 한국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하나씩 짚어가며 확인했다. ‘금강산 지점 개설 준비가 사실인가’ ‘개성공단 지점은 재개를 검토 중인가’ ‘수익 중 일부를 통일기금에 기부한다는 새 금융상품을 실제 판매하느냐’고 물었다. 마지막엔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미국의 대북제재법이 살아있음을 알려드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가.
“뉴욕 지점에는 감독관청인 연방준비은행(FRB)이 주로 접촉한다. 미 재무부 전화는 처음이고, 우리 기재부와 금융위·금감원을 건너뛰고 직접 접촉해온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미 재무부는 ‘미국 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받고 뉴욕 지점의 영업을 허가했음을 상기시켰다. 대북제재를 지키라는 무력시위나 다름없다.”
제재 위반으로 처벌받으면 어떻게 되나.
“한국 은행의 외환업무는 90%가 달러로 이뤄지며, 뉴욕 지점이 시티·JP모건·웰스파고 등 대형 머니센터뱅크에 열어놓은 달러 계좌를 통해 거래한다. 이 계좌가 동결되면 외환업무가 불가능해진다. 은행은 동네 새마을금고가 되고 농협은 시골 단위조합으로 전락한다.”
한·미가 동맹인데 그럴 수 있을까.
“미 정부는 2014년 이란과 거래한 BNP파리바은행에 89억 달러(9조원)의 벌금을 때렸다.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인데도 말이다. 올랑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애걸했지만 딱 1억 달러만 깎아줬다. 미국의 독자 제재는 걸면 걸리는 핵주먹이다. 유엔 제재와 달리 대통령의 행정명령만으로 가능하다.”
청와대는 일단 밀어붙인다는 분위기인데.
“2005년 북한의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돈세탁 사건 때가 생각난다. 당시 노무현 청와대의 386들은 수출입은행을 통해 해결하자고 우겼다. 진동수 기재부 차관은 ‘한국 금융 전체가 박살 난다’고 반대하다 잘렸다. 진 차관은 그 후 기업은행장 선임에서 물먹는 등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했다. 지금 청와대에도 위험한 좌익 모험주의가 엿보인다.”
미국이 반대하면 대북 사업은 어렵나.
“남북이 그제 11~12월에 철도 연결 착공식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철도를 놓으려면 포클레인·불도저 같은 중장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모두 제재 품목이다. 이 장비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유류도 제재 대상이다. 북한 산림녹화도 마찬가지다. 중장비로 사방공사 안 하고 묘목만 심으면 죽는다. 묘목을 심는 북한 근로자를 고용하는 것도 제재 위반이다.”
우리 은행들이 위축될 것 같다.
“오히려 다행인 측면도 있다. 국제금융을 잘 모르는 통일부·국토부 등이 남북사업을 마구 밀어붙여 사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미 재무부의 예방주사를 미리 맞았으니 대북 사업이 정부 마음대로 안 될 것이다. 은행 임직원들은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외부 압력이 느껴지면 녹취부터 하고 본다. 은행 노조도 ‘우리 밥그릇 날아가는 게 아니냐’며 반발할 것이다.”

미 재무부와 접촉한 은행들은 “이제 알아서 몸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결같이 “아무 일도 아니다”는 정부 해명과 달리 “미 재무부 전화가 대북 저승사자 목소리처럼 들려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심기만 살피다가 자칫 미국의 핵펀치를 얻어맞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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