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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수정 논설위원이 간다

북 전쟁고아 길러준 폴란드 교사들 … "60년 지나도 못 잊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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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폴란드로 간 아이들’ 을 찾아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추상미 감독. ’한국전 상처 이면의 선한 얘기를 계속 찾고 싶다“고 했다. [송봉근 기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추상미 감독. ’한국전 상처 이면의 선한 얘기를 계속 찾고 싶다“고 했다. [송봉근 기자]

태풍 ‘콩레이’가 남부 지역을 할퀴고 지나가던 지난 6일 오전.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사회 행사가 잇따라 취소됐다. 해운대구 장산 메가박스로 가는 길, 바람에 꺾인 나무가 도로 위에 누웠고, 키를 높인 파도는 부두 턱을 넘나들었다. 강풍을 피해 미리 온 관객들 덕에 다큐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시사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북한이 전쟁 고아들을 폴란드로 보내고 8년 뒤 소환할 때까지,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이뤄진 교사와 고아들의 사랑을 되짚는 얘기다. 전후 대한민국이 전쟁고아를 서방의 해외 가정으로 입양시킬 때, 북한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양육원으로 아이들을 맡겼다. 어느 편이 옳았는지의 평가를 벗어난, 부끄럽고 아픈 역사다.

프와코비체 1270명의 고아들 #추상미 감독, 장편 다큐로 재조명 #“많이 배워 새로운 조국 건설하라” #북, 1951년 위탁하고 8년 뒤 송환 #1961년 이후 편지도 끊겼지만 #생존 교사들, 눈물로 추억해 #“전쟁 상처 함께 한 교사들의 연민 #같은 마음으로 탈북민 보듬었으면”

‘폴란드로 간 아이들’(상영시간 80분,10월 31일 개봉)은 연극 ‘빨간 피터팬의 고백’으로 유명한 배우 고 추송웅씨의 딸, 추상미씨의 첫 장편 다큐 작품. 배우를 거쳐 감독으로 변신한 추씨는 탈북자 출신의 배우 지망생 이송씨와 폴란드 서남부 르부벡 쉴롱스키 시 근처 마을 프와코비체를 찾는다. 추 감독은 “산후 우울증을 겪던 시기, 피골이 상접한 북한 꽃제비 소녀의 사진을 보고 엄마로서 가슴이 턱 막혔다”며 그러던 중 “폴란드의 북한 고아 얘기를 들었다. 모든 게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했다.

“기차역 승강장에 며칠에 걸쳐 아이들을 실은 기차가 도착했다. 모두 바지와 하얀색 셔츠를 입고 모자를 썼다. 아이들은 여러 종류의 기생충에 감염돼 있었고, 건강 상태가 안 좋았다. 폭격의 기억 때문인지 밤이면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요제프 보로비에츠(93) 프와코비체 양육원 원장의 회고다. 추 감독은 “애초 극영화를 생각하고 폴란드로 갔는데, 65년 전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교사들을 만난 뒤 이분들이 돌아가시기 전 기록영화로 먼저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1956년 7월 4일 동유럽 순방길에 폴란드 시비데르 양육원을 찾아 북한 고아들을 격려하고 있는 김일성. [사진 이해성 교수]

1956년 7월 4일 동유럽 순방길에 폴란드 시비데르 양육원을 찾아 북한 고아들을 격려하고 있는 김일성. [사진 이해성 교수]

폴란드 브로츠와프대학 한국학과 이해성 교수는 2014·2016년 폴란드의 북한 고아와 관련해 두 편의 논문을 냈다. 이 교수는 이메일을 통해 “11년 전 프와코비체에서 열린 한인교회 어린이 성경학교에 참가한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한글 비석을 보고 마을 주민들을 수소문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폴란드 라디오 브로츠와프 지국 기자이자 PD였던 욜란타 크리소바타가 이 양육원의 스토리를 세상에 알리고, 2007년 미국인 감독 패트릭 요커와 ‘김귀덕(Kim Ki Dok)’이란 제목의 다큐를 만든 것을 알았다. 이 교수에 따르면 패트릭은 자신의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묘원에서 ‘김귀덕’이라는 비석이 세워진 무덤을 발견하고 친구인 욜란타에게 알렸다고 한다. 김귀덕은 폴란드 도착 2년 만에 백혈병에 걸린 열세살 소녀. 교사들은 “의사가 자신의 피를 혈관에서 곧바로 아이에게 직접 헌혈했다. 우리의 노력에도 그 아이는 눈을 감았다”고 증언했다. 욜란타는 이를 바탕으로 실화소설 『천사의 날개(Feathers of Fallen Angels)』(2013)도 썼다.

프와코비체의 13세 소녀 김귀덕의 묘. 소녀는 북한 고아들이 1959년 모두 귀환한 뒤 홀로 남았다.

프와코비체의 13세 소녀 김귀덕의 묘. 소녀는 북한 고아들이 1959년 모두 귀환한 뒤 홀로 남았다.

북한은 왜 고아들을 폴란드로 보냈을까. 이 교수는 “전쟁 수행과 전후 복구에 5만여명이나 되는 고아들이 큰 부담이 된 북한 정권이 1951년 북한 문화선전상 허정숙을 통해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에게 북한 고아들을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허정숙 명의의 ‘어린이 학살자, 미국의 책임’이란 제목의 기고문이 폴란드 일간지에 실렸다. 이 교수는 전쟁고아를 받아 교육해주겠다는 우방의 제안을 북한이 수용했다고 분석한다. 중국과 러시아로 간 전쟁고아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교수는 “산발적인 자료로 분석한 결과 동유럽을 거쳐 간 아이들은 폴란드 6000여 명(추상미 감독은 욜란타의 언급을 토대로 1500명이라고 주장한다), 루마니아 3000여 명, 헝가리 950여 명, 동독 600여 명, 체코슬로바키아 400여 명, 불가리아에 500여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폴란드로 온 고아 수가 가장 많은 이유,그리고 폴란드 교사들이 이토록 헌신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추상미 감독은 “2차 대전 말미 독일군의 폭격에 엄청난 희생을 겪은 폴란드 시민들이 북한 고아들에게 갖는 동병상련, ‘상처의 연대’”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1차적으로는, 한국 전쟁이 미·소의 각축장이 된 상황에서 ‘사회주의 형제국’들이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사회 체제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조약에 따라 소련에서 풀려난 수많은 폴란드인, 특히 고아들을 인도가 6년 동안 보살펴 줬는데, 이런 경험으로 인해 북한 고아 문제가 대두되자  위탁교육이라는 인도주의적 방안을 먼저 제시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프와코비체에 앞서 북한 고아들은 고우오트치즈나, 시비데르 등으로도 보내졌다. 폴란드 당국은 이 두 곳에 대해선 체제선전의 도구로 활용했지만, 1270명까지 수용한 프와코비체의 존재는 비밀에 부쳤다. 300여 명의 교사와 보모, 의료인 등에게 비밀유지 서약까지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만 3~4세부터 10살 정도까지 다양했다. 낮에는 폴란드식 정규 수업과 인솔 교사 10여 명으로부터 모국어와 역사를 배웠다. 저녁엔 사상 무장 교육도 철저히 받았다. 북한 애국가보다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주로 불렀다고 한다.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알려진 50년대 말보다 더 일찍 시작됐다는 얘기다. “최대한 많이 배워라” “전문가가 돼야 한다” “조국에 돌아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문이 지속적으로 아이들에게 전달됐다. 전략적인 엘리트 육성 위탁 교육이었던 셈이다. 김일성은 1956년 동유럽 순방 때 시비데르 양육원을 찾았고, 남일 외무상 등 북한 고위 인사들이 거의 매년 프와코비체를 방문했다고 한다.

프와코비체 양육원 아이들과 교사. [사진 이해성 교수]

프와코비체 양육원 아이들과 교사. [사진 이해성 교수]

폴란드 교사들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우리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 뭐든지 하려 했다.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폴란드에서 가족을 느끼도록. 우리도 참혹한 6년간의 전쟁을 겪었다.” 요제프 원장의 얘기다. 아이들은 ‘아버지(Abodzi)’ ‘어머니(Omoni)’로 불렀다. 폴란드 교사들은 북한교사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에게 몰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1958년, 북한의 전후 복구 노동력 동원 운동인 ‘천리마 행군’시작된 시점에 아이들을 단계별로 소환하기 시작했다.1차로 북송된 아이들의 편지를 통해 고된 노동에 동원되고 있는 현실이 전해졌다. “어떤 아이들은 눈 위에 눕거나 자기 몸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몸을 아프게 해서 가지 않으려고. 무슨 할 말이 있었겠나. 너희 나라가 너희들이 필요하단다고 했다.” 59년 7월 31일 아이들은 모두 떠났다. 김귀덕만 남기고.

요제프 원장은 “편지를 계속 보내 프와코비체로 불러달라고 한 아이가 있었는데, 편지를 누군가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답장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1961년 이후 아이들의 편지를 받은 교사는 없었다. 양육원을 멋대로 나가 돌아다닌 말썽꾸러기 ‘원둔천’(또는 온둔촌)이란 아이는 교사들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귀환 뒤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걸어가겠다고 나섰다가 중국 땅에서 늪에 빠져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의 편지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 추 감독은 “폴란드 고아 출신들이 북한 내에서 엘리트로 성장한 경우는 많았다”며 “폴란드 주재 대사를 지낸 이도 있고, 주로 교사로 일한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영화 내용이 공개된 뒤 추 감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 폴란드 고아 출신으로 탈북해서 아들과 서울에서 살던 70대 할아버지가 지난해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다. 사망 전, 폴란드로 이민을 가려고 무척 노력했다고 한다. 또다른 사연은 시사회에서 공개됐다. 평안북도 삭주 출신의 조순형씨는 “고교 때 영어 선생님, 박춘금 선생님이 폴란드 고아 출신이었다. 가족이 없어 명절 때마다 아이들이 음식을 싸서 선생님 집에 갔다”고 회고했다.

촬영 중 힘들었던 점은.
“아주 중요한 교사 몇 분이 인터뷰를 거절했다. 북한 대사관과의 관계 때문인 듯 했다.”
영화 도입부 남북한 전쟁으로만 묘사됐다. 북한의 침략을 일부러 쓰지 않았나.
“남침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공의, 정의의 개념을 뛰어넘는 사랑, 상처의 연대, 상처에 대한 공감을 얘기하고자 했다. 굳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쓰는 게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사랑을 그리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보수 성향 지인들은 ‘폐허가 된 평양’ 묘사를 두고 이거 반미영화야? 하기도 했고, 탈북민들의 수용소 증언 부분을 다르게 보는 분들도 있더라. 이번 영화를 계기로, 분단으로 이어진 한국전의 상처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을 찾고 싶다.”
전쟁고아 중 남한 출신도 있다고 나온다.
“욜란타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됐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아이들의 기생충 검사를 하니, 남한 전역에 분포한 기생충이었다는 거다. 한국 전 때 파견된 폴란드 의사와 연구자들로부터 검증받았다고 했다. 북한군이 남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생긴 고아들을 모아 함께 보낸 것 같다.”
탈북 청소년들의 인터뷰도 담았는데.
“송이가 한 말이 있다. ‘남한은 돈 없으면 학교도 못 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감자 두 알 중 하나는 남한 친구에게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오니까 빵을 두개 들고 있어도 자기가 다 먹고 먹다 남으면 버리더라’는 얘기다. 폴란드로 가려다 돌아가신 탈북자도 우리가 보듬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의미있는 일이 북한 고아들을 돌본 일이었다. 그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한 요제프 원장의 말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김수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