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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해지는 보이스피싱···윤석열 지검장 직인까지 위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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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민중기 서울중앙지법원장,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등 세 사람의 직인이 함께 찍힌 보이스피싱 위조 공문. '금융감독원 위원장'이란 잘못된 직함을 썼다. [사진 독자]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민중기 서울중앙지법원장,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등 세 사람의 직인이 함께 찍힌 보이스피싱 위조 공문. '금융감독원 위원장'이란 잘못된 직함을 썼다. [사진 독자]

취업준비생 A(21)씨는 지난해 11월 몇 년 만에 걸려온 중학교 동창의 전화를 받았다. 동창은 서울 강남의 한 고급 식당으로 A씨를 부른 뒤 “이런 거 맨날 먹고 싶냐”고 물었다. "여행사의 해외 콜센터에서 일하면 한 달에 5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말에 A씨는 동창을 따라 중국 옌볜으로 갔다. 논밭 사이에 있는 낡은 건물 안 사무실에 들어가니 전화기 수십대와 서류가 놓여 있었다. 한국인 개인 정보가 수백개 나열돼 있었다.

동창 시켜 취준생 옌볜으로 유인 #감금 뒤 피싱 강제 교육한 경우도 #국내 사기 피해 1년 새 54% 늘어

 동창을 비롯해 한국말을 쓰는 중국인들은 3일 안에 보이스피싱 대본을 강제로 외우라고 강요했고 틀리면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탈출하던 다른 한국인이 커피포트로 맞고 화상을 입은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그는 3주간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서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귀국 후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지난 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손을 벌벌 떨면서 “귀국 후 가족들의 팔다리도 자른다는 협박도 받았다"며 "불안해서 부모님에게 하루에도 수십통씩 안부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그래픽=김영옥 기자

 ‘그놈 목소리’ 보이스피싱이 또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찰청이 최근 발표한 2018년 상반기 보이스피싱 피해 현황에 따르면 올 1~6월 1만6338건 피해가 접수됐다. 피해액은 1796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1만626건·1051억원)보다 발생 건수로는 54%, 피해액은 71% 증가했다. 2014년 2만2205건에서 2016년 1만7040건으로 주춤하던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2017년 2만4259건으로 늘었고 올해도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A씨의 제보를 통해 해당 보이스피싱 조직을 검거한 경찰은 최근 2년 동안 80명이 넘는 한국인이 중국과 태국, 필리핀에 설치된 해당 조직 콜센터에서 일한 것으로 파악했다. 조직원 중 20대가 70%에 달했다. A씨는 “조직원이 ‘한국에선 직장 구해도 집도 못 산다. 여기서 우리와 일하면 억대 연봉도 가능하다’며 회유했다”고 말했다. 안동현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1계장은 “한국인 대상 보이스피싱을 하려면 말투가 어눌한 외국 출신으론 한계가 있다"며 "한국인 조직원이 돈이 부족한 20~30대 취업준비생에 접근해 중국으로 유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입수한 현지 행동강령에는 ‘경찰에게 잡히면 배신한 조직원이 사장이라고 답하라’ ‘도망가면 사람을 시켜서 반드시 죽인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중국에서 두 차례 보이스피싱 조직에 끌려갔던 B(30)씨는 “한국으로 잠깐 들어올 기회가 있었는데 잠적을 하니 조직원이 끝까지 찾아와 때렸다”며 “중국 조직을 활용해 한국에서 살인을 벌이는 영화 ‘신세계’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영화 '신세계'에서 묘사한 중국 조직폭력배. 중국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에 감금됐던 한국인들은 현지 상황이 '신세계'와 유사했다고 전한다. 오른쪽은 보이스피싱 이미지. [연합뉴스 등]

영화 '신세계'에서 묘사한 중국 조직폭력배. 중국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에 감금됐던 한국인들은 현지 상황이 '신세계'와 유사했다고 전한다. 오른쪽은 보이스피싱 이미지. [연합뉴스 등]

 보이스피싱 수법도 한층 대담하고 치밀해졌다. 최근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민중기 서울중앙지법원장,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의 직인이 함께 찍힌 위조 서류도 발견됐다. ‘금융감독원 위원장’이란 잘못된 직함을 썼다. “계좌가 돈세탁에 이용됐으니 다른 계좌로 돈을 이체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한 뒤 진짜라고 믿도록 서류를 보내는 방식이다. 서류에 사용된 서울중앙지검 팀 이름과 검사 이름도 실존하는 사람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끌려갔던 한국인들은 “금융권 대출 상담 정보가 외부로 새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B씨는 “2금융권 상담에서 대출 거절이 되면 돈이 필요한 사람으로 파악돼 보이스피싱의 표적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정보를 묻는 전화가 오면 끊고 다시 그 번호로 걸어야 한다"며 "안내 음성이 아닌 사람 목소리가 나오면 보이스피싱”이라고 덧붙였다.

 보이스피싱을 줄이려면 국내에서 통장을 빌려준 사람에게 법적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필재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는 “통장 대여자는 지금까지 ‘실수로 속아 빌려줬다’고 대응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며 “가담 정도를 따져 통장 대여자에게도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와야 보이스피싱도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민상‧김정연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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