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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 정부와 싸우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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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은 교황 초청 계기로 살펴본 북한 인권

북한 인권운동가인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가 지난 5월 강화도 해변가에서 쌀과 달러가 든 페트병을 바다로 던지고 있는 모습. [뉴시스]

북한 인권운동가인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가 지난 5월 강화도 해변가에서 쌀과 달러가 든 페트병을 바다로 던지고 있는 모습. [뉴시스]

북한 인권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전략은 무엇일까. 2016년 9월 시행된 북한인권법이 2년여 만에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이 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통일부의 북한인권기록센터와 법무부의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존재감을 찾기 어렵게 됐다. 북한인권재단은 정쟁에 휘말리면서 출범조차 하지 못한 채 예산만 낭비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선 상황 관리만 유지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국내외 주장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라”는 것이 청와대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북한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초청한 것을 계기로 북한 인권 문제는 또다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법무부 인권기록보존소 이전 #정부 무대응 전략 상징적 의미 #인권 재단 놓고 대립, 7억 세금 낭비 #내년 예산 108억에서 8억으로 줄여 #인권법 개정 통해 문제 제기하고 #정부 아닌 민간 영역에 맡겨야

북한 인권문제의 최전선에는 2003년 5월 설립된 북한인권정보센터가 있다. 정치학 박사인 윤여상 소장은 “교황이 북한에 갈 경우 인권 문제는 눈감을 수 없을 것”이라며 “교황청이 북한의 인권상황을 알 수 있도록 교황 대사 등을 통해 관련 자료를 보내거나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천주교 주교회의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센터 측은 2008년부터 지금까지 통일부 등의 협조를 얻어 11만4454건의 북한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했다. 사건 7만1473건과 4만2981명의 사람이 대상이었다. 2010년 이후의 인권 상황을 김정일이 통치하던 2000년대와 비교했을 때 생명권과 피의자 및 구금자의 권리를 짓밟는 사례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생명권 침해의 경우 판결에 의한 사형이 62%가량을 차지했고, 즉결처형(2.7%)과 공무원에 의한 개인적 살해도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생체 실험을 위한 실험용 살해도 38건이나 차지한 점이다. 반면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권, 이주 및 주거권 등과 관련된 인권 침해는 상당 부분 감소하는 등 전반적으로 인권 상황은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센터 측의 설명이다. 정당 설립 과정에서의 자유가 박탈당하거나 선거에서 협박을 받는 등의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한 탈북인은 공개장소에서 있었던 총살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한으로 들어온 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40대 남성은 2009년 원산 항공대학 비행장 주변에서 한 주민이 군대의 전화선을 끊었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처형된 주민은 토끼풀을 뜯으러 갔다가 버려진 전선을 발견, 이 전선을 집으로 가져와 토끼장과 닭장을 엮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군부는 “나라의 신경선을 자른 죄는 엄중히 처벌받아야 한다”며 해당 지역 보안서장이 주관하는 가운데 처형됐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CD를 몰래 들여왔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사망일에 매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역 매표원이 군대의 탄알을 빼돌려 팔았다는 혐의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탈북인은 “현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인권문제를 가급적 거론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일반 서민은 물론 탈북인들에게는 크게 실망스런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명분으로 북한 인권 문제가 수면 아래로 내려갈 경우 북한의 일반인들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하나원에서 이뤄지는 탈북자를 상대로 한 조사도 과거와는 달리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함께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인권법에 근거해 통일부와 법무부에 관련 기구가 만들어진 것은 통일이 됐을 때 인권 침해를 저지른 사람들을 찾아내고 처벌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는 독일의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1961년 8월 동독이 일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설치한 이후 동독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자 서독 정부는 접경지역인 잘츠기터에 인권 침해사례를 조사하기 위한 기록소를 만들었다. 기록소가 만들어진 이후 서독에서도 “동서독 통일에 방해가 된다”며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해 나왔다.

현재 인권법을 놓고 여야가 정쟁을 벌이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법무부가 과천 청사에 있던 북한인권기록 보존소를 법무연수원 용인분원으로 이전하고 탈북자 조사를 담당했던 검사 한 명을 빼버린 것을 놓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법무부 측은 “법무부 청사가 협소해 부득이하게 보존소를 옮기게 된 것이지 북한 인권을 홀대한다거나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북한 관련 단체들이 바라보는 입장은 다르다. 우선 북한인권재단이 출범도 하지 못한 채 사무실을 폐쇄한 것은 이 정부가 북한 인권을 정치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법에 따르면 인권재단은 북한 인권실태에 대한 조사와 연구 등을 총괄할 수 있다. 12명의 위원은 여야 추천 5명, 통일부 천거 2명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당이 인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재단 설립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사무실은 텅 빈 채 남아있다 임대 해지를 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무실 임대료로 7억 가까운 예산이 허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북한 인권과 관련한 통일부의 내년 예산은 8억원에 불과하다. 올해 108억원에서 무려 100억원이나 삭감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또 외교부의 북한 인권대사가 후임자로 선정될 것으로 예상됐던 북한인권 국제협력 대사는 공석으로 남은 채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윤여상 소장은 “통일부가 2008년부터 체결한 용역계약을 올해 말에 끝내자며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며 “이 때문에 하나원에서 탈북자들을 상대로 한 인권 조사도 내년부터는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야당은 현 정부가 북한 눈치를 보는 것은 물론 북한 인권이 부각될 경우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지난주 국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판문점 선언과 북·미공동성명에 인권 관련 용어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는 보고서가 유엔총회에 제출됐고,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북한 인권상황을 규탄하는 결의안과 법안이 채택됐는데도 이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엔과 각종 북한 관련 단체들은 북한 시민들의 인권 상황은 여전히 열악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대응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현재 인권법에 문제가 많고, 이로 인해 남북 관계 정상화에 걸림돌이 된다면 이를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 정부가 직접 인권 문제를 조사할 것이 아니라 민간의 영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인권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법의 목적이 처벌을 위한 것인지, 진상규명을 하기 위한 것인지, 피해자와 피의자를 규명하기 위한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소장은 “북한 인권 문제를 놓고 북한과 싸워야 하는데 우리는 정부와 싸우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인권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문제라는 얘기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