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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호의 이나불] 임산부가 '애국자'면 딩크족은 '매국노'인가

중앙일보

입력

KBS 일일드라마 '내일도 맑음'에서 한 극중 인물이 부인에게 "늦둥이 하나 어떻게 안 되겠느냐. 우리도 애국 한 번 해보자"며 애국을 외치고 있다. [사진 KBS]

KBS 일일드라마 '내일도 맑음'에서 한 극중 인물이 부인에게 "늦둥이 하나 어떻게 안 되겠느냐. 우리도 애국 한 번 해보자"며 애국을 외치고 있다. [사진 KBS]

"우리도 애국 한 번 합시다. 애국, 애국, 애국, 애국, 애국, 애국" 지난 10일 KBS 일일 드라마 '내일도 맑음'에서 난데없는 '애국' 타령이 이어졌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애국'은 임신·출산이다.

애국 타령의 시작은 이렇다. 극 중에서 엄마를 도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황지은(하승리 분)은 이날 방송에서 시어머니이자 이모 윤진희(심혜진 분)에게 "임신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약을 지어 먹겠다"고 얘기한다. 그러자 진희는 깜짝 놀라며 "다들 출산율 떨어진다고 난리인데 니가 '애국자'다"며 치켜세운다.

대화는 이어진다. 진희는 자신의 남편과 이야기하며 "우리 회사 디자이너는 딩크족인지 뭔지 애 안 낳고 자기네 삶 즐긴다고 선언했다가 우연치 않게 임신 돼서 낳네 마네 말이 많다"며 딩크족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남편(최재성 분)은 "우리도 늦둥이 하나 안 되겠느냐. 우리도 애국 한 번 하자"며 질색하는 진희의 뒤통수에 대고 주먹까지 불끈 쥐고 "애국, 애국, 애국"을 외친다.

임신이 애국? 개인 희생시키는 국가주의적 발상

'내일은 맑음'은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과 함께 온갖 악행까지 점철된 '막장' 드라마지만, 표면상으로는 '가족 드라마'를 표방하는 공영방송 KBS의 일일 드라마다. 그러니 출산을 장려하는 계몽성을 띠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리도 노골적이고 반복적으로 '임신=애국'이라는 프레임을 드러내니 묵직한 불편함을 피할 길이 없다.

구태여 강조해 말할 필요도 없이 결혼·출산은 개인의 결정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과도하게 씌우는 행위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선택을 강요하고 개인을 희생시킨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 과정에서 여성은 그저 부국(富國)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다층적이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저출산 문제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여성의 이기심' 탓으로 돌아가 지나치게 단순화된다.

여성이 부국(富國) 위한 수단인가

2015년 SBS 아침드라마 '어머님은 내 며느리'.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사실상 모든 여성 출연자가 극 중에서 임신하거나 출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사진 SBS]

2015년 SBS 아침드라마 '어머님은 내 며느리'.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사실상 모든 여성 출연자가 극 중에서 임신하거나 출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사진 SBS]

'임신=애국' 프레임은 대중문화 곳곳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퍼져 있다. 최근 연예인들은 유행이라도 된 듯 하나같이 관찰 예능에 나와 임신 사실을 공개하는데, 이를 보고 주위 출연진들은 "애국자"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도 우스갯소리로 다둥이 부모들에게 "애국자"라고 말하곤 하지만, 대중 매체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임신이 해피엔딩의 '만능키'라도 되는 양 등장인물이 임신하고 이를 가족에게 알리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 '기-승-전-임신' 드라마도 적지 않다.

'임신=애국' 프레임의 폭력성은 2016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대한민국 출산 지도'의 폭력성과도 닮아있다. 출산 지도란 지난 2016년 12월 행정자치부에서 공개한 지역별 임신·출산 관련 통계 지도를 말한다. 지역별 출생아 수, 출산율, 조혼인율 등을 표시했다. 문제는 20세~44세까지의 여성을 '가임기 여성'으로 규정하고 그 인구수를 지역별로 집계해 사실상 등수를 매겼다는 점이다. "지자체 저출산 극복 프로젝트"라는 설명과 함께였다. 해당 지역을 클릭하면 가임기 여성이 몇 명인지 한 자릿수까지 알 수 있었다.

2016년 12월 논란이 됐던 대한민국 출산지도

2016년 12월 논란이 됐던 대한민국 출산지도

아이 낳는 게 애국? 안 낳으면 반국가적 행위?

출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던 취지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을 저출산 문제 해결의 도구로 인식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임기 여성이 많은 동네에 가서 강간하고 임신시키면 나라에서 포상해주냐"는 농담도 나왔는데, 이는 명백히 국가가 조장한 폭력이다. (손희정, 「페미니스트 대통령 시대의 대한민국에게 권함」)

대중문화 속 '임신=애국' 타령을 듣고 있노라면, '국가주의적 저출산 대책이 먹히지 않으니 공영 방송의 일일 드라마가 나선 것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의구심마저 든다. 아, 지난해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고스펙 여성들이 하향 선택 결혼을 할 수 있도록 문화 콘텐트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이는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저출산 대책 보고서를 쓰기도 했으니, 전혀 근거가 없진 않다고 봐야 할까.

여기서 묻고 싶다. 아이를 낳는 게 '애국'이라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개인의 행위는 반국가적 행위인가. 언제까지 우리는 '임신=애국'이라는 국가주의적 프레임을 접해야 할까.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노진호의 이나불] 시리즈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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