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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보여"···규모 610억 도박사이트 잡은 무속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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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를 메고 어깨에다가 무궁화를 달고…푸다닥 나는데 그 날개 하나가 착 부러지는 게 보여. 이해 가셔?”

지난 8월 3일 경기도 평택시의 한 점집. 여성 무속인이 대뜸 이씨(41)에게 말했다. 이씨는 일명 ‘강남바둑이’라는 불법 도박사이트의 총책이었다. 경찰에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점집을 찾은 참이었다. 그런데 무속인 입에서 “머리에 독수리가 보이고, 무궁화가 보인다”는 얘기가 나왔다.

“합법화로 나오든지 불법화로 나오든지 어쨌거나 간판이 나와. 현재 간판 이름이?”

“‘강남’이에요….”

무속인 물음에 이씨는 홀린 듯 답했다. “혼자 하는 게 아니라잖아요.” 무속인은 자기 조직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질문은 이어졌다. “컴퓨터 같은 거, 게임방 같은 데가 막 지나가요. 불법화냐 이런 소리가 나오고 관청이 왔다갔다 하는 게 보여. 불법화가 들어가는데 뭐예요. 그 소리가?”

이씨는 술술 불었다. “해외에서 돈을 벌고 나라에 세금을 안 내도 법을 어기는 거잖아요. 사실.” 결국 이씨는 자신의 인적사항은 물론 불법 활동 때 쓰는 가명, 자신이 해외를 오가며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사실과 그렇게 번 돈으로 와이프에게 월 3000만원 준다는 얘기마저 해버렸다.

서울 방배경찰서에 따르면 이씨는 2017년 5월부터 지난 8월까지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했다. 일본에 서버를 두고, 서버 관리는 중국에서 했다. 대포통장을 100여 개 두고 불법 이득을 챙겼다. 국내에는 이씨 아래에 대포통장 관리·운영책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철저한 대비’였다.
이렇게 번 돈이 상당했다. 경찰이 파악한 도박사이트 규모는 610억원, 이씨 일당이 챙긴 돈만 128억원에 이른다. 도박사이트 회원들이 게임머니로 쓰려고 보내온 돈 중 10%를 환전 수수료로 받고, 게임을 한 번 할 때마다 배팅액의 1%를 챙겼다.

경찰은 지난 8월 방배서 인근 은행에서 ATM기 여러 곳에서 돈을 빼내는 중년 남성을 발견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방배서 지능수사팀은 불심검문을 해 인출책 문모(45)씨를 붙잡을 수 있었다. 인출책은 검거했지만 조직의 범행 전말을 비교적 빨리 알 수 있었던 건 이씨와 무속인의 대화가 담긴 '녹음파일' 덕분이었다. 이씨는 이 파일을 휴대전화에 저장해뒀는데 경찰이 대포통장 관리책 박모(45)씨를 수원의 한 모텔에서 검거하는 과정에서 이를 압수했다.

김현수 방배서 지능수사팀장은 “불법 사이트 운영 조직의 규모와 피의자 인적 사항 등을 특정하는 데 최소 1년이 걸린다. 하지만 이 녹음파일 덕분에 첫 피의자 검거 후 한 달여 만에 조직의 전반적인 규모를 알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 방배경찰서가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진을 검가하면 압수한 물품들. 조한대 기자

서울 방배경찰서가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진을 검가하면 압수한 물품들. 조한대 기자

경찰은 1억원 이상 도박을 한 회원 12명과 대포통장 명의 대여자 등 총 27명을 붙잡았다. 이 중 관리책 박씨와 대포통장 인출책 문씨를 구속했다. 조직의 전말을 알려준 이씨는 그 사이 중국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씨를 포함해 해외로 도주한 조직원들을 지명수배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이씨 명의의 계좌·부동산뿐 아니라 차명 계좌 현황도 들여다보며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다. 이씨는 이제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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