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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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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나에 대하여

나는 아주 추상적이다. 아주 모호하고 흐릿하다. 손가락 끝으로 마구 문질러 놓은 파스텔화 같다. 아니, 그러나 나는 파스텔화처럼 부드럽지는 못하다. 물론 이것은 추측이다. 나는 나에 대해, 특히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자기 강화로 딱딱해진 내벽은 생활의 필수 아이템이다. 쉽게 상처받지도 않고, 쉽게 상처 줄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 안은 작은 생채기에도 벌겋게 부어올라 결국에는 죽음에 가깝게 치열하게 밀어 올리는 '두려움'이라는 내피가 포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역시 아주 추상적이다. 나는 오 개월에서 육 개월로 넘어가는 아주 추상적인 시간을 버거킹에서 일을 하며 보냈다. 그 오 개월에서 육 개월로 넘어가는 아주 추상적인 시간 전에는 대학생이라는 아주 모호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호성에 꽤 충실하였고 본분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 본분과 모호성이 나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어느 정도로 애매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되겠지만.

나는 버거킹에서 일을 한다. 오 개월에서 육 개월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그곳에서 일을 했다. 우리나라의 최저 시급인 2,100원보다 600원이 많은 2,700원을 시간당으로 받는 버거킹의 크루다. 처음에는 2,100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2,700원을 받는다. 아침 시간에 일을 하면 돈을 더 받을 수 있지만 아침은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재미가 없다. 나는 오후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 일을 한다. 그러니까 하루에 10,800원을 번다. 10,800원은 매우 애매한 돈이다. 가까운 어딘가를 가거나 소소한 무언가를 하거나, 간단한 먹거리를 먹거나 할 때에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지만 약간의 거리와 깊이, 스타일 등을 추가하면 특별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종이와 금속으로 의미 변환을 해 버리고 만다. 사람들이 말했다. 왜, 아르바이트만 하지요? 직장을 찾을 때가 아닌가요? 다들 의아해 한다. 그러나 나의 꿈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면 이제야 나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겠지. 정확히 나의 꿈은 백수다. 아니, 어쩌면 모호할지 모르겠지만.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숭고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 따위에도 관심이 없다. 평생 어떤 한 직장만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것저것 시간 날 때마다 하면 좀 어떤가.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그 해의 나머지, 혹은 돈이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혹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고 싶다. 고정적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답답하다. 이유는 오직 그거 하나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답답하기 때문에 고정적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졸업한 후에도 학교의 취업 상담실에서 몇 번이나 전화가 왔었다. 이력서를 써서 가져오면 추천해 주겠어요. 졸업한 지 꽤 되었으니 너무 큰 욕심은 가지지 말고 취업하세요. 그럭저럭 괜찮은 곳은 많이 있어요. 나는 알았다고 대답만 한다. 그들은 나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루에 10,800원을 벌면서 왜 버거킹을 고집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것 가지고 몇 달 벌어서 나머지 일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거킹에서 일을 하는 이유는 버거킹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저 버거킹의 햄버거를 좋아하기 때문에 버거킹에서 일하고 싶었다. 버거킹의 직접 불 위에서 구운 패티는 맛있다. 그저, 그것뿐이다. 게다가 패스트푸드 점의 오후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 역시 좋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영화나 전쟁에서 초반부터 픽픽, 총알에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인격을 부여하지 않듯이 나 역시 그렇다. 그들의 죽음은 영화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패스트푸드 점의 오후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의 사람들은 나에게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좋은 구경거리가 되거나 혹은 흘린 얼음이나 떨어뜨린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뒤섞어 내 놓아도 맛있게 먹는 어떤 집단일 뿐이다. 크루들에게 허락된 크레이지 버거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의 눈요깃감을 제공하고 조금은 봉사를 요구하는 하나의 수단 혹은 과정일 뿐이다. 이것은 그들을 설명하기에는 아주 모호하기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이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 10,800원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인간이다. 나는 욕심이 없는 인간이지만 지독한 욕망에 시달리고 있다. 케이블 티비 사용료와 통신비만 해도 한 달이면 꽤 큰 부담이다. 물론 내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은 그 돈을 때우기 위해서는 아니다. 흥미가 없는 것에 몸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나는 학교 선배의 소개를 받고 하이틴 로맨스류의 소설들을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은 물론 재미있다. 물론 번역 작가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다. 말은 초벌 번역이라고 하는데 초벌 번역보다 돈은 많이 준다. 출판된 책들을 볼 때도 내가 번역한 것이 별반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하는 것이 과연 초벌 번역인 것인지 매우 애매해진다. 나는 이렇듯 매우 모호하고 애매한 인간이다. 고로, 추상적인 인간인 것이다.

그에 대해서

그는 나의 애인이다. 물론 그 말도 모호하다면 모호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듯 하고 나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다. 나는 데카르트 같은 회의론자는 아니지만 사랑이란 감정처럼 애매하고 모순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한다'라는 말과 섹스뿐이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과 섹스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오직 욕망뿐이다. 욕망은 모호하지 않다. 명확하고 핵심적이고 중심이다. 욕망은 절대 비켜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분명 그의 애인이다.

그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아일랜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일랜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의 아버지가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했으므로 아마 그의 할머니는 아일랜드 사람일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정확히 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의 혈통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스무 살 때까지 아시아인이라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텍사스의 한 목장 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지금 스물아홉 살이고 나보다 세 살이 많다. 그는 스무 살에 댈러스 도시로 나와 쿵후를 배웠다. 아시아의 무술 영화를 보고 꿈을 키웠다고 말했었다. 그는 곧 태권도 역시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에게 아시아는 신비의 세계, 아름다운 또 다른 문명이었다. 그러나 미안. 댈러스 밤의 소란스러움과 서울의 그것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차마 말해주지 못했다.

그의 직업은 모호하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가 작은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가, 스시 집에서 일을 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는 그 세 가지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다. 물론 누구의 기준에 성실하냐의 문제겠지만. 뭐, 그렇다고 해도 모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그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한정적이다. 그는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헨리 제임스를 모르고 있고 당연히 '나사의 회전'같은 소설은 알고 있지 못한다. 대신 그는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비교적 그것에 대한 생각이 나와 비슷했다. 그와 나의 공통점은 꽤 많다. 대신 우리는 뷰욕의 음악을 함께 좋아하고 함께 그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뷰욕을 J-pop(Japanese pop)으로 알고 있고 나는 일본 팝이 아니라 트립팝이라는 장르로 알고 있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둘 다 그 가사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공통점을 계속해서 발굴 중에 있다. 아직까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그는 '천생연분'이라는 한국어를 서툴게 발음한다. 물론 내가 가르쳐 준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버거킹 역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와 나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시간을 약속하고 같은 시간에 같은 햄버거를 먹는다. 그곳의 메뉴와 이곳의 메뉴가 같은지는 매우 애매하다. 댈러스에서만 들어가는 야채, 서울에서만 사용되는 빵의 사이즈가 조금씩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그러나 간신히 이것저것을 맞추어 본 결과 와퍼 버거가 같은 메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약속을 하고 저녁을 먹을 때에는 와퍼 세트를 먹는다. 나는 그와 약속한 날은 와퍼 세트를, 그렇지 않은 날에는 크레이지 버거를 먹는다. 와퍼 세트는 나에게 매우 특별한 요리다. 우리는 함께 와퍼 버거를 먹으면서 서로의 감촉을 상상한다. 빵과 빵 사이는 입술이 되고 안의 고기 조각은 달콤한 혀가 된다. 우리는 함께 달콤하게 입을 맞추듯 부드럽게 햄버거를 먹는다.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따스하게, 때로는 장난치듯, 때로는 차갑고 우울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햄버거를 먹는다. 그러다가 햄버거의 마지막 부분을 탐욕스럽게 삼키게 되면 온몸의 돌기가 돋고 눈에 힘을 줄 수 없게 되며 배꼽 아래 어딘가의 찌릿한 전기 자극에 축 늘어지게 된다. 나는 전율로 부르르 떨고 결국 참을 수 없이 마스터베이션을 하게 된다. 햄버거는 내게 그렇듯 늘 자극적이다. 아니, 오 이런. 그가 내게 자극적인 것이겠지.

나는 언제나 그와 함께 음악을 듣고, 그와 함께 영화를 본다. 그와 함께 책을 읽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나는 알파벳으로 된 책보다 한글로 된 책을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즐기는 것은 음악과 영화로 충분하다. 함께 즐긴 영화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내고는 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극장에 가본 적은 없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다. 아주 애매하지만 설레는 관계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BoBo라는 사이트의 대화방에서 처음 만났고 그 후로 MTN의 메신저를 통해 단 둘이서만 만났다. 그는 내가 그를 만난 이후에도 대화방에 가는 것에 질투심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제하는 것으로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여전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BoBo 사이트에서 그와 동시에 탈퇴함으로써 나의 사랑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곳의 대화방을 꽤 종종 드나든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그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별반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아닌 것 같다, 라고. BoBo 사이트는 우리에게 꽤 각별한 의미를 준다.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장난으로 시작해서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결국에는 함께 섹스를 하는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곳의 메신저를 통해 만나고 있지만 모든 연인에게 첫 추억의 장소는 소중한 법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BoBo의 실재 회사는 홍콩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둘 다 홍콩을 남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홍콩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이야기했었다. 물론,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직 아니다.

나는 그를 매일 만날 수가 없다. 그는 바쁘다. 매일매일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항상 나에게 다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섹스로 확인하지 않으면 애매하게 되어버리는 것인 게다. 여건이 되었을 때에는 매일 만났다. 우리의 만남 횟수는 사랑의 증표나 다름없었다. 처음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자주 만났었다. 잠도 자지 않았고, 식사도 거르고 그와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안에 사랑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안정되기 시작하자 일상의 선을 지키며 그를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와 만나는 밀도가 조금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만남의 밀도가 옅어진 것만큼의 결핍을 섹스로 채워나갔다. 기껏해야 몇 차례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의 섹스는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미, 우리는 충분한 연대감을 갖고 있었고 서로를 아꼈으며, 서로에게 만족했다. 우리의 격정적인 사랑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가끔 선물도 한다. 속옷을 선물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DVD를 선물하기도 하고 내 생일에는 백 송이의 장미를 선물하기도 했다. 내가 백 송이의 싱싱한 장미를 선물받았던 날에는 함께 와인을 마시며 세러 본의 음악을 들었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재즈 뮤지션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길게 하지는 못했다. 나는 피곤했었고, 그는 바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싱싱한 장미 백 송이도 꽤 신선한 선물이었지만 나에게 더 의미 깊은 선물이 있다. 그것은 시계다. 어느 날 그에게서 소포가 하나 왔고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그가 왜 나에게 그것을 선물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나와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만나서 이야기하기 위해 시계를 보내왔던 것이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스와치의 새로운 신상품을 용케도 알고 사서 보내왔다. 흰 끈에 소용돌이 모양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얇고 세련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스와치의 다른 모델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시계 안에 다른 시계가 들어있는 디자인이었다.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미리 댈러스의 시간과 서울의 시간이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이제 머릿속으로 혼동스럽게 계산하지 않아도 서울의 시간에 지배받고 있는 나의 생활과 댈러스의 시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댈러스에서, 나는 서울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지만 함께 시간을 맞추어 놓고 식사를 하게 되면 우리는 분명 같은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하는 식사는 나에게는 저녁 식사가, 그에게는 아침 식사가 되겠지만 말이다. 시간은 우리를 갈라놓지만 우리는 그 명확성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아주 모순적인 상황에 갇혀 있다. 물론 아직 그를 실제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해외여행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그는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

컴퓨터가 곧 그이고, 메신저가 그이며, 대화방 창이 곧 그이고,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는 글자들이 그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나에게 시계를 보내주고 싱싱한 장미를 배달시키는 그는 아니다. 햄버거가 그이고 패티는 그의 달콤한 혀지만 그것이 그는 아니다. 매우 모호하고 애매하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상당히 모호하다.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한 나의 이야기 역시 아주 모호하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인지 나에 대한 이야기인지, 우리의 이야기인지 아주 모호하다. 왜 이렇게 되었지?

옆집의 그에 대하여

나는 작은 원룸에 살고 있다. 평수로 따지면 일곱 평이 조금 넘을 것 같다. 나는 이곳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번역 일을 하고, 인터넷을 하고 댈러스의 그와 만나 이야기를 하고 섹스를 하는 공간이다. '쉰다'는 의미만으로는 나의 공간을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 나의 원룸은 칠 층짜리 건물의 이 층에 있다. 그러니까 건물의 배꼽쯤 되는 위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배꼽보다 아래의 위치다. 여름에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보면 내 방 앞에 있는 울창한 나무 가지들은 여자의 음모로 변한다. 나의 방은 그것에 가려지고 보호되어 바깥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쉽게 알지 못한다. 내 방은 언제든 열려있지만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알지는 못한다. 배꼽보다 아래 위치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층이기 때문에 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운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같은 시간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출근을 하거나 퇴근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다. 그저 나는 상상만을 할 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담소를 하고 조용히 웃고, 그러다가 카풀을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사랑에 빠지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한동안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보았지만 언제나 나 혼자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이 너무나 지루해졌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보통은 더 빠른 일이다. 내가 몽롱하게 서서 껌뻑껌뻑 켜졌다 꺼지는 숫자들을 바라보는 일의 이유가 모호하게 느껴지자 나는 엘리베이터 타는 일을 그만두었다. 계단을 두 개씩 오르내리는 일이 내게는 더 적당한 생활인 것이다.

나의 원룸 옆에는 또 다른 원룸이 하나 더 있다. 나의 원룸 앞으로는 계단이 있고 나의 원룸 옆의 또 다른 원룸의 앞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나의 원룸 옆에 있는 또 다른 원룸에 살고 있는 그도 역시 계단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열여섯 번 어깨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내가 이곳에 일년 육개월 정도를 살았으므로 하루 동안 0.029197080 정도의 확률로 그와 어깨를 부딪친 것이다. 물론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는 그 후에 생겼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열쇠를 잃어버렸는지 계단에 초라하게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침 관리인 아저씨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무작정 관리인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태였다.

"관리인 아저씨 못 보셨나요?"

그가 나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미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를 알고 있었다.

"아니요."

내가 그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나는 그 두 마디로 이미 친구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 원룸에 살면서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첫 인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의 집에 잠깐 들어오라고 말했었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는 관리인 아저씨에게 연락을 부탁하는 쪽지를 남기고 나의 원룸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서 루크의 음악을 들었다. 어색한 상황을 우리는 꽤 요령 있게 피해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루크의 음악에 함께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녁 시간에 버거킹 안으로 들이닥치는 사람들이나, 전쟁 영화에서 픽픽 쓰러지는 그것들에게서 인격을 부여받은 하나의 등장인물로 그가 인식되기 시작하는 대목이었다. 십 오 분이 채 되지 않는 음악 세 곡이 끝나고 네 번째 곡의 전주가 막 끝나려는 순간 그는 관리인 아저씨의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네 번째 곡의 일절이 끝나기도 전에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기고 나의 원룸 앞으로 올라온 관리인 아저씨에게 열쇠를 건네받았다. 나는 그가 열쇠를 열고 자신의 원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구겨 신은 신발을 거의 벗을 듯이 끌며 돌아서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나는 그를 불러 이메일 주소를 물어보았다. 그는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 집에도 놀러오세요. 초대할게요."

나는 그의 그 말이 아주 모호하게 들렸다. 그 말은 의미심장할 수도, 그저 인사치레의 지나가는 말일 수도. 나는 헛갈렸다.

그가 나의 원룸에서 나간 후 나는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함께 켰다. 나는 댈러스의 그와 메신저를 통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동시에 틀어놓는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함은 이상하게도 일곱 평밖에 되지 않는 공간을 휑하게 만들어 놓는다.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워 아늑하고 꽉 짜인 듯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다. 나는 텔레비전의 소리를 들으며 그의 메일 계정 사이트에서 그의 아이디로 그의 프로필을 검색해 보았다. 그것으로 그가 대학생이고 나보다 세살 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전공은 물리학과, 취미는 음악,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의 추상성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내가 버거킹에서 일하고 있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 명 중에 한 사람이듯이 그 역시 전 세계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수십만 명 중 한 사람일 뿐이며 기타 연주를 즐기는 수천만 명 중 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모호성과 명확성 사이의 간극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미국의 부시 대통령의 방한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그 부대 행사로 이루어질…….

텔레비전 뉴스는 언제나 명료하다. 아니, 명료함을, 명확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순전히 내 이야기일 뿐이다.

그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혹은 그를 만나기 하루 전.

그와 이야기하지 못한 지 벌써 일주일째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모호하다. 7/365이라는 숫자는 꽤 미약해 보이기는 하나,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로서의 일주일은 꽤 긴 시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지난 일주일은 살아내는 이로서의 일주일에 가까웠다. 그가 연락을 해오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불안감을 느끼다 못해 공황상태가 되기까지 하였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라는 것은 오직, 아는 사람만이 안다. 그는 내가 언제나 접속하는 시간을 알고 있다. 나 역시 그가 접속하는 시간을 알고 있다. 메신저는 [접속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접속 때 볼 수 있도록 쪽지로 남기시겠습니까?] 라며 대화창만 무심하게 화면에 떠오른다. 이 공허감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욕구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인터넷에서의 시간은 극단위화가 된다. 일분의 체감 시간은 얼마쯤 될까. 만약 둘만이서 채팅을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일분 동안 대답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혹은 접속하려는 사이트에 일분 동안 접속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컴퓨터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서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것이다. 그 일분을 기다렸다고 해서 말이다. 나는 그런 시간으로 거의 일주일을 보낸 셈이었다. 물론, 감정의 기복은 있었지만. 그가 접속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버거킹에서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이 [접속 중]이었다.

물론 처음 이틀 동안은 꽤 담담했었다. 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터넷의 메신저를 통한 만남이라는 것이 실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언제나 생각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몇 시에 무슨 역 몇 번 출구에서 만나, 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은 달랐다. 몇 시에 무슨 역 몇 번 출구에서 만나, 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접속하지 않으면 나의 그 어떤 감정도, 기분도, 욕망도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혹은 나는 그저 과거의 인터넷 메신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글자 몇 개로, 아무런 인격이 부여되지 않은 글자 몇 개로 사라질 수 있는 존재였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일까. 나는 떨어뜨린 바늘을 찾듯이 머릿속을 뒤졌다. 그의 집 앞으로 달려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물을 수도 없다. 울며불며 그의 허리를 붙들고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고 따귀를 때리며 그의 연락 없었음을 추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썼다.

'당신은 나를 죽이고 있는 거야. 그걸 정말 모르겠어? 제발 연락해 줘. 기다릴게.'

그는 더 이상 내게 욕망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일까. 다른 상대를 찾은 것일까. 나는 그가 마지막 변명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접속하지 않았습니다]는 밤새 살을 부비며 함께 잠을 잤던 애인이 다음날 아무 말도 없이 연락처를 바꿔버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흘째가 되어서야 나는 그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가 선물한 스와치 시계는 나흘째 되는 날도 부질없이 우리의 언제나 변함없는, 아니 변함이 생긴 댈러스 시각 오후 여섯 시, 서울 시각 아침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흘째 되는 날 역시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인터넷을 접속한 후에 메신저를 띄워놓고 그의 [접속하지 않았습니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어떤 쪽지나 메일도 남기지 않았고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었다. 내가 보냈던 메일 역시 그는 확인조차 하고 있지 않았었다. 메일은 매일 확인한다고 해서 메일인 것이다. 그가 나의 메일을 확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나의 메일을 읽지 않거나 혹은 읽지 않고 삭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흘째가 되어서야 눈물이 나왔다. 혹시나 하는 약간의 여유가 나흘째 되는 날에는 사라지고 만 듯했다. 그의 [접속하지 않았습니다]는 내게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인 것이었다. 그것이 나흘째 날의 의미였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애를 써서 찾아내려 했던 사흘째 날과는 달리 그의 잔인한 방식이 못내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는 나의 모든 귀와 입을 막고 살아있는 채로 생매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역시 많은 채팅 경험으로 그런 사소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너를 잊어주겠어.

옆집에서는, 더 정확히 말해 나의 원룸 옆에 있는 원룸에서는 밤새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사를 가는 것인지 짐을 챙기는 듯한 소리와 한명 이상의 발소리가 내 방에까지 조심스럽게 울린다. 하루에 0.029197080의 확률로 계단에서 어깨를 부딪쳤던, 메일 계정으로 스토커처럼 신상을 파헤쳤던 옆집의 그도 이제 어깨를 부딪칠 수 있는 몇 천만분의 일의 확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이제 정말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 한총련의 이적 행위를 포착한 검찰은 이번 검거에서 놓친 다섯 명에게 수배령을 내리고…….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텔레비전 소리뿐이었다.

닷새째 되는 날은 그저 허탈해졌었던 것 갔다. 하룻밤을 간격으로 나의 감정 상태도 급격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와 메신저를 통해 같은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같은 음악을 듣거나, 혹은 와퍼 버거를 먹자는 약속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론 이것은 영화 속에서 인격이 부여되지 않아서 지나가면서 어깨를 부딪치거나 심지어 총에 맞았다고 하여도 하나도 아플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들의 관점에서이다. 나는 여전히 버거킹에서 일하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청소를 하고, 휴지통 주변을 정리한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가 내게서 사라져버린 지 닷새째 되는 날에도. 나는 여전히 버거킹에서 일하는 크루이고 그저 그런 소설 나부랭이를 번역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버거킹에 햄버거를 먹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 속에서 그의 부재를 잊으려고 했다. 아니, 그의 존재를 잊으려고 했다. 내가 다른 버거킹 모자를 쓰고 있는 크루들 중 하나일 뿐인 것처럼 그 역시 내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댈러스의 그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을 마치고 나의 원룸으로 향했다. 일한 양이나 시간은 다른 날과는 다를 것이 없는데도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축지법을 알고 있다면 좋을 텐데.

"이봐, 아가씨."

관리인 아저씨였다.

"아가씨 옆집에 사는 총각 있지. 그 총각 요즘 연락되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가씨하고 친한 것 같던데. 연락해 볼 수 없나?"

옆집의 그가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 나의 원룸에 잠시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관리인 아저씨는 그때 그에게 비상 열쇠를 건네주기 위해 나의 원룸으로 와서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었다. 나는 관리인 아저씨의 '친하다'라는 말이 이명처럼 울리며 귀를 아프게 했다.

"어제는 형사들인지, 뭔지 하는 양반들이 왔었다고. 밤에 와서는 방을 이 잡듯이 뒤져놓고 갔어. 도대체 무슨 일인지, 거참."

나는 귀를 만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그 속을 누가 알았겠어. 아가씨도 몰랐을 거야. 하여튼 그 총각 보거든 바로 신고해요. 나한테 알려줘도 좋고."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귀는 찌릿찌릿 아프고 있었다.

엿새째 되는 날에는 댈러스의 그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왔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싶었다. 원래 처음부터 그의 존재 자체는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 이번 미국 테러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선전포고를 내린 미국은…….

- 일단 미국의 선전 포고에 길을 내어주기로 한 파키스탄의 태도에 반대하는 파키스탄 국민들은 격렬한 반미 시위와 함께…….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뉴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매미채로 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계세요?"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인터폰을 들었다.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검은 양복 차림의 두 남자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문을 빠끔히 열었다.

"옆집에 있는 남자 아시지요?"

나는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만나신 적은 없으시지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내가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것만 물었다. 누구에게 물었어도 끄덕일 수 있는 질문들이었다. 그들은 옆집의 그를 어디어디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옆집 사람과 가깝지도 않은데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가능성은 작지만 만나거나 보게 된다면 꼭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옆집에 있는 학생 말고 다른 학생들 네 명을 더 찾고 있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있으시면 신고해 주세요."

나는 그들의 아주 사무적인 표정으로 뻥긋뻥긋하는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람의 얼굴은 어떤 부분이 극도로 확대되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는 법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이루는 법이지만 전체가 없는 부분은 아주 모호해져 버린다.

"그 사람하고 친한데요."

나는 뜬금없이 그의 확대된 입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네?"

"그 사람과 친하다고요. 아주 친해요. 아주 많이요. 그 사람 학교, 전공, 취미, 이메일까지 다 알고 있는 걸요."

나는 그들의 벌어진 입만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마치 그들의 입은 당황한 사람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아니, 그들이 당황한 것인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이지요? 무슨 정보를 갖고 계신 건가요?"

그들은 내가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는 듯이 더 목소리를 내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와 친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들이 갖고 있는 정보는 아주 모호하기 짝이 없거든요. 당신들의 정보에는 내가 그와 단 한번만 이야기를 한 걸로 나오겠지만 실제로는 아주 많이 친해요."

그들은 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헛웃음을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내게 그를 보면 신고를 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가버렸다. 그들은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내가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저 믿고 싶었다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나는 다시 댈러스의 그를 떠올렸다. 우리가 사랑했다는 것 역시 누가 믿어 줄까. 그렇게 모호하기 짝이 없는데.

이렇게 나는 그 없이 일주일, 그러니까 이레째 날을 맞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증오했고, 여전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를 잊었고, 그를 떠올리지 않아도 와퍼 버거를 먹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근 일주일 동안 하지 않았던 채팅을 하기 시작했다. 댈러스의 그를 잊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진정한 일상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을 잃었다는 것과 그의 잔인한 방법에 치를 떨고 가슴 쓰려 하는 완전히 극복되지 않은 잊음, 일상이었다. 사랑은 쉽게 오지만 떠날 때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세 시간이 넘게 미국인 두 명, 파키스탄인 한 명, 브루나이인 한 명, 아르헨티나인 한 명, 중국인 한 명과 보이스 채팅을 했다. 아르헨티나가 파키스탄에게 반미 시위에 대해 물었지만 파키스탄은 반미 시위가 대단하냐면서 잘 모르겠으니 뉴스를 틀어 보겠다고 했고 브루나이는 뉴욕에 갈 계획이었는데 테러 때문에 못 가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중국은 나에게 북한을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기가 귀찮아졌지만 해외여행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아르헨티나와 두 미국 중 하나는 나에게 극동아시아인으로서 이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전쟁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채팅으로 만난 나의 애인과 연락을 하지 못한 지 일주일이 되었고 그것이 그가 나에게 저지른 이별의 방식인 것 같다고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그러자 파키스탄은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고 했고 두 미국은 나의 애인이 댈러스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하자 같은 미국인으로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으며 아르헨티나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가 울기 시작하자 모두가 침울해져 버렸고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옛 애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모두 사랑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두 울다가 웃기도 하였고 자신에게 각별했던 옛 사랑의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울음을 멈추자 우리는 각각 기약도 없이 하나 둘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컴퓨터 스피커에서 그 어떤 누구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그들은 그 웹 사이트에서 보이스 채팅을 이용하는 수십만 명 중 누군지 알 수 없는 하나로 변하였다. 나 역시 사랑의 아픔을 갖고 있는 전 세계의 수천만, 아니 수억, 수십억명 중 하나로 변하였다. 나는 끝끝내 울음을 참을 수가 없게 되었고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종료시키지도 않고 전원을 뽑아 버린 채 컴퓨터 자판 위에 엎드려 계속해서, 계속해서 울어 버렸다.

그를 만난다는 것, 혹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

저녁때가 되자 나는 다시 버거킹으로 일을 하러 나갔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나는 버거킹의 모자를 쓴 크루가 되어 있었다. 나는 와퍼 버거가 못 견디게 먹고 싶어졌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욕망이었다. 그 없이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믿고 싶음이었다. 나는 일을 끝마치면서 와퍼 세트를 들고 나왔다. 들고 나오면서도 와퍼 버거를 먹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먹지 않아도 그저 막 불에서 구워진 패티가 안에 들어 있는 따듯한 햄버거는 그 느낌만으로도 좋았다. 나는 집에서 조용히 그것을 먹기로 결정한다. 이것을 먹다가 다시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도저히 지하철 안에서는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가방 속에 와퍼 세트 종이봉투를 집어넣었다.

- 이번 테러로 인해 불특정 다수를 목표로 한 테러에 대한 공포가 날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 이번 미국의 보복 전쟁을 보도하는 방송사들의 태도는 마치 컴퓨터 게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그저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성된 전투기와 폭파 장면이 게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텔레비전을 틀어 뉴스 채널로 고정시켜 놓고 그 동안 소홀히 하고 있었던 번역 일을 꺼내 놓았다. 이번 번역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여자의 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끝끝내 그것에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사랑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단련되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는 생각을 했다.

"딩동"

누굴까? 자정이 벌써 지난 시간이었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폰을 들면서도 그가 사라진 지 여드레째 날이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떠올렸다.

"누구세……."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그였다. 옆집의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잠금쇠를 풀자마자 낚아채듯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해요. 잠깐만 있을게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그의 이마와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곤란해지도록 하지 않을게요. 만약 누가 나를 봤느냐고 물으면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지금 잠깐 여기 있도록 해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새러 본의 음악을 틀어 놓고 그에게 욕실을 안내한 후에 인스턴트 커피를 대접했다. 그는 새러 본의 음악을 들으면서 씻고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새러 본이 다섯 곡의 노래를 부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 좋아하세요? 음악이 취미라고 했죠. 기타도 연주한다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듯이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스토커처럼 그의 흔적을 찾아 인터넷에서 뒤져 알아낸 몇 가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녔던 학교.학과와 취미 이야기,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일주일 동안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이미 경계가 풀어진 그의 눈동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은 와퍼 버거처럼 뭉뚱그려지지 않고 탄력 있게 목으로, 젖가슴으로 내려갔다.

그는 나의 팔을 베고 두어 시간쯤 잠을 잔 후에 더 이상 쉬지 못하고 옷을 챙겨 입고 가버렸다. 그가 왜 도망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끝끝내 묻지 않는 나의 입술에 그는 입을 맞추며 다시 만나자는 애매한 말을 남기고는 나의 원룸을 빠져나갔다. 내가 그에게 왜 쫓기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모호한 일처럼 느껴졌다. 죄든, 생각이든, 사랑이든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없는 것 같다. 의미를 부여하는 이의 의지라면 의지인 것이겠지. 나는 창문 틈으로 두터운 무채색의 공기를 투덕투덕 가르는 그의 달음질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그가 내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아니, 너무 깜깜했으므로 그것은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창문의 두터운 무채색이 엷어질 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나는 뒤척거리다가 결국 날이 밝아질 무렵이 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길게 자지 못하였다. 여덟 시쯤 되자 나는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윙윙 컴퓨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의 존재감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완전히 켜지자 나는 댈러스의 그와의 만남의 통로인 메신저부터 삭제했다. 이제 정말 내 가슴에서도 그가 삭제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지우는 동안 컴퓨터는 소화가 되지 않는 듯 딸꾹질 같은 소리를 낸다. 나는 기계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나의 메일 계정으로 갔다.

[새로운 편지가 5통 도착해 있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나에게 받은 편지함은 눈에 번쩍 띄는 무언가를 번쩍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눈에도 척, 광고 메일 사이에 영어로 된 제목의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발신자를 보니 댈러스의 그였다. 내 가슴에서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떨어뜨린다는 그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광고 메일들을 삭제한 후에 그의 메일을 열어보았다. 이제 나는 모호한 이별이 아닌, 확실한 그의 입장으로 우리의 이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인가. 한눈에 영어로 된 글이 들어오지 않았다. 너를 만나고 싶어…… 그 동안 출장이었어. 그래서 너의 메일을 제대로 확인을 해 보지 못했지. 미안해…… 이번 일정에 한국도 끼어 있어.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가게 될 거야. 너를 놀래 주고 싶었어. 그래서 이렇게 늦게 메일로 보낸 것이지. 놀랐지? 내일 모레 한국에 입국하게 될 거야. 일정을 하루 앞당겨서 입국하는 날, 하루는 너와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입국 시간은 아침 열한 시야. 나와 줄 거지…… 여전히 널 사랑해. 드디어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야. 날짜를 보니 이틀 전에 보낸 메일이었다. 그가 사라진 지 이레째 되는 날 보낸 것이었다. 그는 메일에 자신의 사진까지 첨부해 보내왔다. 그는 붉은 갈색 머리에 약간 붉은빛이 도는 피부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낯선 얼굴과 낯선 미소는 현실적이지 않았다. 시계는 벌써 여덟 시 삼십 분을 향해 커브를 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서둘러 챙겨 나왔다. 시간이 없었다. 무작정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공항버스를 탔다.

여유는 버스를 타고 나니 생겼다. 그러나 내게 여유는 편안함을 주지 못했다. 시간을 맞추어 갈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도, 그가 나를 처음 보고 어떻게 느낄까 하는 두려움도 없었다. 나는 줄곧 그에 대해 생각했다. 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함께 섹스를 하였던 그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와 사진에서 본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나는 가방 속에서 어제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넣어 두었던 와퍼 세트를 꺼냈다. 버거킹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테이프로 싸매어져 있는 콜라는 단 한 방울도 흘릴 틈이 없었지만 이미 기포는 모두 사라지고 맹맹하고 들척지근한 김빠진 것이 되어 버려 있었다. 와퍼 버거는 차갑게 식어 약간 굳어 있었지만 나는 포장을 벗겨 우걱우걱 먹었다. 나는 와퍼 버거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내가 식은 와퍼를 먹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그저 식은 빵조각과 고기조각을 먹고 있는 것이다. 흐물흐물해진 야채 조각이 목으로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버스는 인천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울컥 멀미를 할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은 버스 창에 아른거려 나의 시선은 그것을 뚫고 밖을 향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의 모호함이 사라지는 거야. 나는 같은 말을 되씹었다. 최면을 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사랑은 그저 모호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이미 경계가 모호해진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이미 우리도 없고, 너희도 없고, 우리의 것도 없고, 너희의 것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모호해진 사람들. 몇 가지 범주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형의 성격, 취미, 외모. 누군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거짓인지도 모른다. 그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인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작용. 그것이 외부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든지 아무도 관여하지도, 관여할 수도 없다. 모호함이 극대화된 나와 그. 그리고 모호함이 극대화된 그곳에서 그와 나의 사랑. 내가 그를 알고 있다는 것 역시 거짓일까? 모호하다. 역시 모호하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아니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모호하다. 모호함을 조장하는 세상. 명치끝이 차가워지면서 얼얼하게 아파오고 있었다. 용케도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한 나는 그가 도착했는지부터 살펴보았다.

"수 분 내로 도착하겠습니다."

안내는 컴퓨터를 두들겨 보더니 기계처럼 미소 짓고, 기계처럼 대답한다. 안내는 내가 기다려야 할 출구 번호를 역시 기계적인 미소와 손짓으로 가르쳐 주었다. 내가 그 출구에 도착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그가 탔을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 베이징발 비행기가 도착했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쉽게 흐르지 않았다. 아니, 이것은 시간의 심리적 흐름이 늦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계의 일 초, 일 분이 나의 고된 노동으로 밀어 올려지는 초침과 분침의 결과인 것만 같았다. 그 뒤로 다시 이십여 분이 지나고 나자 베이징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온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니터에서 출국자들의 얼굴을 살펴보던 나는 나의 컴퓨터에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듯 짐을 막 찾아 출구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붉은 머리에 붉은빛의 얼굴을 한 남자였다. 문1이 열리고 짐을 끌고 나오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더 이상 모호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모호했다. 그는 잠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일행도 없이 혼자 온 듯한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내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뱃속에서 무슨 반란이 일어난 듯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더니 먹은 것들이 넘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뒤로 하고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좌변기를 껴안고 아침에 먹었던 와퍼 버거를 꾸웩꾸웩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가 왜 옆집의 그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모호했다. 언제나 내가 '그'라고 말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아니다. 나의 머리카락이 변기 안의 물 근처에서 간신히 흔들린다. 모든 것이 모호하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추상적이고, 모든 것이 모호하다. 변기 안에는 내가 토해낸 와퍼 버거가, 변기 바깥에는 내가 토사물처럼 쏟아져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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