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풍등 떨어지고 잔디 불붙고 검은 연기 나도 … 18분간 몰랐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호기심이 부른 참사였다. 17시간 만에 진화된 경기도 고양시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고양저유소에 불을 낸 스리랑카인 A씨(27) 얘기다.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의 실화였지만 국가기반시설인 저유소에 화재를 감지하는 안전장치 하나 없는 등 총체적인 안전불감증에 의한 사고였다. 일각에서는 스리랑카 노동자에 대한 동정론도 나온다. 화재 발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처도 늦었던 저유소측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이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스리랑카 노동자와 관련 “그가 동남풍을 불게 했겠느냐. 우연에 우연이 중첩된 실수에 구속영장은 지나친 것 같다”고 말했다.

고양 기름탱크 CCTV 감시 소홀 #직원 6명 있었지만 참사 못 막아 #탱크 주변 잔디 깐 곳 고양 유일 #스리랑카인 영장에 일부 동정론

고양경찰서는 9일 풍등을 날려 저유소에 불을 낸 혐의(중실화)로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A씨가 풍등을 쫓아가는 장면, 잔디에 떨어져 불이 붙고, 18분 뒤 폭발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TV(CCTV)를 공개했다.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9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사건 당일 CCTV 영상을 공개했다. ① 7일 오전 10시32분경 저유소 인근 공사현장에서 A씨가 풍등을 날린 뒤 이를 따라가고 있다. ② 날아간 풍등(원 안)이 저유소 잔디에 낙하하고 있다. ③ 저유소 탱크가 폭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9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사건 당일 CCTV 영상을 공개했다. ① 7일 오전 10시32분경 저유소 인근 공사현장에서 A씨가 풍등을 날린 뒤 이를 따라가고 있다. ② 날아간 풍등(원 안)이 저유소 잔디에 낙하하고 있다. ③ 저유소 탱크가 폭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신걸 고양경찰서장은 “피의자는 당일 오전 10시32분 자신이 일하던 공사현장에서 풍등(지름 40㎝, 높이 60㎝)에 ‘뜰까’ 싶은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며 “불이 붙은 풍등이 갑자기 바람에 날려 300m 떨어진 저유소 쪽으로 날아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의자가 저유소(기름 보관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중실화죄를 적용했다”고 말했다. 다만 A씨가 풍등이 떨어져 잔디에 불이 붙은 것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가 날린 풍등은 전날 인근 서정초등학교 행사 때 날아온 것이다. 학교 측에서 주말을 맞아 실시한 ‘아버지 캠프’ 때 80개의 풍등을 날렸는데 이중 2개가 A씨가 일하는 공사장으로 떨어진 것이다.

동영상 분석결과 잔디의 불은 오전 10시36분에 시작됐다. 풍등이 잔디에 떨어진 지 2분 뒤다. 이후 18분 뒤인 10시54분에 폭발했다. 잔디에 붙은 불꽃이 탱크에 설치돼 있던 유증기 환기구에 들어간 것이다. 전국 8개 저유소(판교·고양·천안·대전·대구·광주·전주·원주) 가운데 고양저유소만 탱크 주변에 잔디가 깔렸다.

경찰에 따르면 18분 동안 대한송유관공사 측은 화재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당시 휴일 근무자 6명 중 CCTV가 있는 중앙통제실에 2명이 있었다. 경찰은 CCTV 감시를 소홀히 한 직원 등을 상대로 과실 여부를 수사할 계획이다.

송유관공사 경인지사 관계자는 “사고 후 CCTV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검은 연기를 확인했지만, 워낙 미세하게 발생해 당시 직원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이번 사고를 계기로 시설 투자를 통해 재발 방지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고양 저유소 화재’가 결국은 안전장치 부재가 불러온 인재(人災)라는 전문가 지적이 나오고 있다. 허술한 국내법과 미흡한 안전 인프라가 화재를 낳았다는 것이다.

풍등으로 인한 화재가 잇따르자 지난해 12월 국내 소방기본법이 개정됐다. 개정된 조항(12조)에는 소방당국이 풍등 등 소형 열기구를 날리는 행위를 금지 또는 제한하는 걸 명령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개정된 법의 실효성 문제를 지적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재는 소방당국이 날리지 말라고 명령을 한 후 이를 어겼을 때만 벌금(200만원)을 내게 돼 있다”며 “날리는 행위 자체가 불법은 아닌 데다 풍등으로 인한 화재를 막기에는 허술하고 애매하다”고 지적했다.

저유소의 안전시설 미흡도 도마 위에 올랐다. 휘발유 440만L가 들어 있던 저유탱크에는 화재진화용 ‘폼액소화 장비’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폭발하면서 날아간 탱크 덮개와 충돌,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폼액 장비를 탱크 하단에 설치해 폼액이 휘발유 상층부로 떠올라 화재를 진압하는 방식이 있다”며 “탱크를 설치할 때 이런 기술이 없었는지, 비용 문제 등으로 일부러 설치하지 않았는지 등을 확인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위험 시설에 대한 ‘실시간 모니터링 부재’도 문제로 지적됐다. 경찰에 따르면, 대한송유관공사 측은 저유탱크 주변 잔디에 연기가 나기 시작해 폭발로 이어진 18분 동안 화재 사실을 알지 못했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화재 예방 인프라 투자에 인색해선 안된다”며 “예방 시설 투자는 비용발생이 아니라 피해를 막아 그만큼의 수익을 낸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양=임명수 기자, 조한대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