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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글꼴을 찾아서 … ‘600세 한글’ 예술이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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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호 12면

한글 폰트 디자인의 진화

한글 폰트 디자인이 젊어지고 있다. 시대의 기술적 요구와 감성을 민감하게 읽어내고 도전과 탐색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오롯이 담아냈다. 2010년 이후 약진하고 있는 개인 폰트 디자이너들 덕분이다. 이전에는 회사가 만들어낸 폰트가 대세였다.

2010년대 이후 젊은 디자이너 약진 #시대적 감성 담은 글꼴 속속 내놔 #로마자 등 세계 글자와 긴밀 연결 #한글 모르는 외국인도 크게 감탄 #한나체·비가온다체·꼬딕씨체 … #다듬지 않은 일상의 감흥 담아

한글 폰트 작업은 지난한 일이다. 폰트 한 세트를 완성하려면 많게는 1만 자가 넘고 적게도 수천 자에 이르는 글자들을 일일이 디자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노고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기에 폰트 회사에서는 막대한 노동량과 최소 한도로 필요한 작업시간에 비해 터무니없는 단가와 급박한 마감에 시달린다. 이것은 한글 폰트의 불가피한 품질 저하로 이어진다.

개인 디자이너들은 이런 압박과 제약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연구와 장인적인 완성도를 추구한다. 다만 몇몇 후원만으로는 폰트 작업으로 생업이 유지되지 않아 여기에만 집중하기 어렵기에 부득이 완성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제니 시인의 ‘너울과 노을’ 중 한 대목을 본문에 소개된 한글 폰트 8개로 구현했다.

이제니 시인의 ‘너울과 노을’ 중 한 대목을 본문에 소개된 한글 폰트 8개로 구현했다.

일반의 낮은 인식과 인건비 확보의 어려움, 막대한 시간 투자라는 온갖 난관을 뚫고 그래도 의식 있고 헌신적인 개인 디자이너들이 부상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으로 네 가지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인터넷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확대돼 아직 만족스럽지는 않으나마 개인이 폰트 디자인을 유통하고 SNS 등으로 홍보할 수 있는 경로가 생겨났다. 둘째, 크라우드 펀딩 등을 통해 수년에 걸치는 작업 기간 동안의 인건비를 부족해도 어느 정도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셋째, 개인이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컴퓨터SW 등 한글 제작 기술이 발달했다. 넷째, 체계적인 한글 폰트 디자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의 디자인 학과와 사설 교육기관이 늘고 있다. 전문 폰트 디자이너로 바로 활동할 만큼 충분한 교육은 아니지만, 개인의 노력들이 보태어져 졸업작품을 발전시켜 데뷔하는 한글 폰트 상품도 생겨났다. 그뿐 아니라 한글 폰트 디자인 석·박사 및 국외 학위 취득자들도 늘어간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즉위한 지 600주년을 맞은 올해, 단단한 성과를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활동이 더 기대되는 디자이너와 디자인팀의 한글 폰트를 소개한다.

다국어 글자 가족 공존 프로젝트 진행

지난달 중순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국제타이포그래피협회 ATypI(Association Typographique Internationale)의 연례 콘퍼런스에서는 한국 폰트 디자이너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옵티크’를 디자인한 노은유의 한글에 대한 발제를 들은 한 국외 전문가는 비록 평생 한글을 쓸 일이 전혀 없는 외국인들에게도 한글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감탄을 남겼다. 노은유는 ‘윌로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류양희, ‘둥켈산스’를 최근 출시한 함민주와 함께 외국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한글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노은유, 류양희, 함민주는 각각 네덜란드, 영국,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류양희의 ‘윌로우 프로젝트’. [사진 각 디자이너]

류양희의 ‘윌로우 프로젝트’. [사진 각 디자이너]

류양희는 이미 ‘고운한글’ ‘아리따부리’ 등을 통해 뛰어난 한글 디자이너로서의 저력을 입증한 중견 디자이너다. 그의 폰트들은 절제되고 논리가 차분하며 기능에 충실한데, 단아한 형태가 분출하는 가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 결국 시선을 사로잡는다. 류양희는 한글·로마자·그리스문자가 조화로운 글자 가족으로 공존하는 ‘윌로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다국어 글자체답게 글자 가족의 구성과 조화를 위한 면밀한 장치를 여럿 고안했다. 특히 로마자의 이탤릭체에 한글 흘림체 양식 ‘세컨더리 스타일’을 대응시킨 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 폰트는 국제적인 출시를 앞두고 있으며, 정식 상품으로서의 명칭은 아직 미정이다.

노은유의 ‘옵티크’. [사진 각 디자이너]

노은유의 ‘옵티크’. [사진 각 디자이너]

노은유의 ‘옵티크’는 글자 가족을 ‘크기에 따른 시각 보정(Optical Size)’에 따라 본문용(Text)과 제목용(Display)으로 나누어 구성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본문용인 ‘옵티크 텍스트’는 작은 크기에서 잘 읽히도록, 제목용인 ‘옵티크 디스플레이’는 큰 크기에서 한눈에 시선을 끌 수 있도록 각각의 용도에 최적화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썼다.

함민주의 폰트는 건강한 탄력과 발랄한 생기가 넘친다. 한글 폰트가 보여줄 수 있는 두껍고 어둡고 진한 특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둥켈산스’의 ‘둥켈(dunkel)’은 독일어로 ‘어둡다’는 뜻이다. ‘어둡도록 획이 굵은 고딕체’다. 아직 작업이 진행 중인데도 판매를 미리 개시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업그레이드 버전에 반영하는 것이다. 댓글 피드백처럼 사용자의 의견이 창작자와 상호작용하며 진화해 간다.

눈의 ‘말투’와 감정의 확장

우아한형제들의 ‘배달의민족 한나체’를 소개하는 부스. [사진 각 디자이너]

우아한형제들의 ‘배달의민족 한나체’를 소개하는 부스. [사진 각 디자이너]

김기조의 복고적인 레터링을 필두로 하는 복고풍 글자체도 굵직한 흐름을 형성했다. 우아한형제들이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배달의민족 한나체’를 보면 배시시 웃음이 난다. 한나체는 1960~70년대 아크릴 판 위에 시트지를 붙여 칼로 잘라낸 간판을 모티프로 했다. 삐뚤빼뚤 어색하고 조형성이 떨어지는 듯한 인상이 특징이다. 지나치게 공들이거나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우리들 일상에 다시 돌아와 있다. 그 모습이 어딘지 홀가분함을 준다.

현승재(제스타입)의 ‘비옴체’. [사진 각 디자이너]

현승재(제스타입)의 ‘비옴체’. [사진 각 디자이너]

제스타입(ZESSTYPE) 현승재의 ‘비가온다’와 한글씨 김동관의 ‘꼬딕씨’ 및 ‘키큰꼬딕씨체’는 기본적으로 활용도가 높고 단순한 고딕체를 기본으로 하지만 개인의 개성과 말투가 충분히 돋보인다. ‘비가온다’의 가로줄기 모음 위 조그마한 초성 이응은 비가 오고 이슬 맺힌 풍경처럼 서정적이다. ‘키큰꼬딕씨’의 긴 수직선 끝에 좌우로 활짝 벌어진 시옷, 지읒, 쌍시옷 형태도 독특한 감흥을 준다. 대개의 고딕체가 가지는 정돈된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사무적이고 딱딱하지만은 않은 고유한 아취를 풍긴다.

고전적 글자체의 진지한 현대화

양장점의 ‘펜바탕체’ 글꼴들이 벽면에 전시돼 있다. [사진 각 디자이너]

양장점의 ‘펜바탕체’ 글꼴들이 벽면에 전시돼 있다. [사진 각 디자이너]

명조체 계열은 또 어떤가. ‘양장점’은 오늘날 필기도구의 특성을 반영한 ‘펜시리즈’를 디자인하고 있다. 양장점은 ‘양’희재와 ‘장’수영이 의기투합한 디자인 듀오다. 그중 볼펜을 사용한 ‘펜바탕 레귤러’가 먼저 한창 진행 중이다. 꾹꾹 눌러 쓴 미세한 필압의 표현과 획의 끝에 살짝 맺힌 볼펜 똥이 친근하다. 필기하는 인간의 익숙하고 친근한 행동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기울기를 탐구하는 데 많은 노고를 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곧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명조체보다 젊지만 가독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 새로운 본문용 글자체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가끔 젊은 소설가나 시인들의 책을 보면 표지는 그만큼 젊은 활력이 넘치는데, 명조체로 조판된 본문은 다소 고루해 그들의 정신과 문체의 싱싱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산돌 커뮤니케이션의 ‘Sandoll정체’. [사진 각 디자이너]

산돌 커뮤니케이션의 ‘Sandoll정체’. [사진 각 디자이너]

하지만 긴 글을 위한 본문용으로는 마땅히 명조체를 대체할 만한 한글 폰트가 없기에 부득이 천편일률적으로 명조체를 써올 수밖에 없었다. 산돌커뮤니케이션이 여기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가고 있다.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심우진을 디렉터로 영입했고, 송미언·박수현·김초롱 디자이너가 합류해 ‘Sandoll정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전자책 환경을 고려해 스마트폰에서 긴 글을 읽을 때에도 눈에 편하도록 세심하게 제작했다.

‘Sandoll정체’는 아직 출시 전이지만 ‘Sandoll정체 630’이 민음사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본문에 적용돼 그 사용성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또박또박 경필로 쓴 필체 베이스의 폰트가 읽는 속도를 천천히 유도한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수십 페이지 정도 넘어가면서 ‘Sandoll정체 630’에 완전히 익숙해져 일반 명조체로 본문이 짜여 있지 않은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게 됐을 정도다.

폰트 디자이너와 사용자들 가까워지려면

한글 폰트는 전문 인력들의 엄청난 시간, 노동, 오랜 훈련과 판단이 투여돼 완성되는 상품이다. 하지만 폰트 디자이너의 노력에 대한 인식과 보상은 미미하다. 법무법인들에서 소상공인들에게 뜻하지 않은 과도한 폰트 패키지 비용을 청구하며 괴롭힌다는 우울한 소식도 들린다. 이것은 한글 폰트에 헌신하는 디자이너들이 조금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네이버 나눔글꼴처럼 무료로 배포되는 좋은 폰트들도 있다. 하지만 컴퓨터, 디바이스, SW시스템에 처음부터 설치돼 있는 디폴트 폰트에 익숙한 일반 사용자들은 무료 폰트라고 굳이 다운로드받아 설치하는 수고를 널리 들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가령 내가 새로 다운로드받은 폰트를 프레젠테이션 파일에 적용했을 때, 공용 컴퓨터에 그 폰트가 설치돼 있지 않으면 시스템 디폴트 폰트로 바뀌어 문서 디자인이 의도와 다르게 일그러지고 만다.

그렇다면 기업이나 기관이 한글 폰트 디자이너들에게 충분한 라이선스를 제대로 지급하면서 컴퓨터, 디바이스, SW에 새로운 기술 환경과 시대의 흐름에 맞게 디자인된 한글 폰트들을 디폴트 폰트로 꾸준히 업그레이드해 탑재하면 어떨까. 물론 이런 방식에도 부작용은 있을 것이고, 이 방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으며 세부적인 합의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해결책으로든 기능성이 강화되고 다양해진 아름다운 한글 폰트들을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한글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만들어가는 탁월한 폰트들이 한글 사용자들과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기를 간곡히 기대해 본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퍼 pamina77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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