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혁주의 직격 인터뷰

노동 유연성 없이는 혁신성장도 이룰 수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

4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는 ’이 차림이 편한데 4차산업위에 나갈 때는 분위기에 맞추고자 어쩔 수 없이 격식을 차린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4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장병규 4차산업혁명위원장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는 ’이 차림이 편한데 4차산업위에 나갈 때는 분위기에 맞추고자 어쩔 수 없이 격식을 차린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같은 정보통신기술(ICT)을 키우고, 기존 산업에 접목해 혁신을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출범했다. ‘도처에 널린 4차산업 관련 붉은 깃발(규제)’을 뽑아 혁신 엔진에 힘을 불어넣으리란 바람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은행에 대해 은산분리 규제를 완화한 것 정도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성과가 없다. 오는 11일로 출범 1년을 맞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이하 4차산업위)의 성적표다. 초대 위원장은 스타 벤처 기업가인 장병규(45) 블루홀 이사회 의장이 맡았다. 게임 업계 출신의 40대에게 총리급인 위원장을 맡긴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그만큼 위원회 안팎에서 혁신을 기대했다. 장 위원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4일 서울 서초동 개인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기업 내 혁신가는 소수, 다수는 저항 #반대에 변화 못하면 대기업도 위험 #고액연봉자 2%만 내보낼 수 있어도 #혁신 드라이브에 큰 효과 볼 것 #청와대 연임 요청에 수락 의사 전달 #1기 위원엔 정권창출 보상 인사도 #차기 위원은 기존 질서 무너뜨릴 #젊은 인사 뽑아달라 정부에 요청

4차산업위 1년을 평가한다면.
“주변의 기대에 비해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진도는 나가고 있지만, ‘혁명’이란 단어가 이름에 있어 뭔가 큰 변화를 기대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이유가 뭔가.
“첫째는 내 역량과 경험이 부족했다. 둘째는 당·정·청이 굉장히 복잡한 세계라는 것을 몰랐던 때문이다. 나도 사실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 누구는 ‘빨리 규제를 풀고 혁신하라’고 하고, 누구는 ‘보호가 필요하다’고 한다. 충돌하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어야 한다. 비효율적이라고 비칠 정도로 많은 사전 정비 작업이 필요하다.”
공무원들이 규제를 놓지 않는다는 시각이 있다.
“와서 보니 그럴 수밖에 없더라. 혁신한다고 관료를 승진시키거나 보상을 주는 구조가 아니다. 또 급하게 변혁을 추진하면 혼란이 올 수 있다. 혼란을 막고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게 오랜 기간 굳어진 관료의 역할이다. 그래서 규제가 잘 풀리지 않고, ‘복지부동’이란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걸 해소하지 않고 혁신이 가능한가.
“혁신은 민간이 잘하는 분야다. 민간을 혁신의 주체로 삼고, 서서히 바꾸려는 관료와 충돌할 때 청와대가 조율과 중재를 해야 한다.”
청와대가 조율을 잘하고 있나.
“남북 관계와 관련해 지지도가 오르는 걸 보면 전반적으로 잘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와 혁신성장 분야는 미흡하다.”
왜 그렇게 보나.
“일단 고용 지표가 나쁘다. 내가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좋다’고 판단하는 게 비상식적이다. 그리고 정부가 내세우는 혁신성장·소득주도성장·공정경제 가운데 일자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혁신성장이다. 그렇기에 혁신성장도 미흡하다고 보는 것이다.”
혁신성장이 잘 안 되는, 보다 근본적인 진단을 듣고 싶다.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노동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창업가·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분위기다. 혁신성장에는 노동 유연성이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혁신가는 소수다. 대부분은 변화에 저항하고 혁신을 가로막는다. ‘너만 잘 나가려느냐’며 혁신하려는 사람까지 발목을 붙잡는다. 그런 사람을 치워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기업도 변하지 못하고 망할 수 있다. 노동 유연성 없이는 혁신성장도 이룰 수 없다.”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를 시행하면 좋을까.
“노동시장이 경직된 우리나라에서 유연화 제도를 전면 도입하면 문제가 생긴다. 점진적으로 가야 한다. 예컨대 고액 연봉 노동자 중에 2% 정도만 회사가 임의로 내보낼 수 있도록 해도 혁신을 드라이브하는 효과가 클 것이다. 2%면 100명 중 2명에 불과하지만, ‘정부가 친 노동 일변도가 아니라 혁신과 노동에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나간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
청와대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풀려고 나설까.
“모르겠다. 청와대에서 판단할 일이다. 국회도 연관된 문제다.”
노동시장과 관련한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친노동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되더니 이젠 포괄임금제(연장근로·휴일근무수당 등을 적절히 계산해 기본임금에 포함하는 것) 폐지까지 거론된다. 이런 친 노동 신호가 반복되면 기업가는 위축된다. 포괄임금제 폐지는 재고해야 한다. 주 52시간제는 이미 시행됐으니 폐지할 수는 없다. 다만,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평균 주 52시간을 맞출 수 있는 탄력 근로 기간을 늘리자’고 한 얘기만 받아들여 줘도 ‘정부가 친 혁신 쪽으로 돌아섰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분위기가 있다고도 했는데.
“우리나라는 창업가를 ‘잠재적 도둑’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수성가한 창업가를 존경하지 않고 이상한 눈으로 보는데 그게 바람직한 현실인가. 혁신가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분위기에서 젊은이들은 ‘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그저 안정적인 월급쟁이가 되고 싶어한다. 혁신이 될 수 있겠나.”
4차산업혁명에는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그게 되지 않는 건 친노동정책과는 다른 얘기다.
“규제 완화는 늦었지만 시동이 걸렸다. 그간 남북 관계 등으로 바빠 청와대가 많이 신경 쓰지 못한 것 같다. 정말 시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통령이 직접 규제혁신 행사에 나가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규제혁신의 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청와대에 ‘(규제 혁신과 관련해서는) 작은 행사라도 자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게 시장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고, 관료도 따라올 것이다.”
원격의료 같은 헬스케어 분야 규제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국민 입장에서는 답답하겠지만 조금씩 진도가 나가고 있다고 판단한다.”
빅데이터 산업 육성에 필요한 개인정보 활용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완강히 거부한다.
“어떤 목소리를 내는가보다 그들이 논의의 테이블에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시민단체는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계속 같이 논의할 것이다. 청와대도 신경 쓰는 어젠다여서 관련 부처에서 진척시키고 있다.”
차량 공유 분야에서는 택시업계가 아예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논의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문제다. 그런데도 (그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지는 의문이다.”
4차산업위에 대해 비판 조의 얘기만 계속한 것 같다. 제일 큰 업적은 뭔가.
“새로운 사회적 합의 방식을 도입해 안착시키는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해커톤(이해 당사자가 모여 합의를 끌어내는 일종의 끝장 토론)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혁신을 하려면 사회적 협의가 필요하기에 이런 프로세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에 사회적 협의가 필요한 게 우리나라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듯이 들린다.
“민간이 혁신을 주도하는 미국은 혁신 때문에 사회적 문제가 생기면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 소송으로 해결한다. 부작용을 사후에 걷어낼 강력한 장치가 있으니 처음부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한 사후 제동장치가 없다. 그래서 사후 사고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 처음엔 이로 인해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합의 프로세스가 안착하면 가속이 붙을 수 있다.”
청와대가 1년 연임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4차산업위원장 임기는 1년)
“거절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절차가 남아 연임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1년간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다면서도 연임을 수락한 배경이 뭔가.
“고민이 많았다. 잘했으면 쉽게 떠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잘못했으니 떠나기가 오히려 어려웠다. 연임해서 좀 더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원회 역할이 ‘심의·조정’에 묶여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그렇다. 기본적으로 정부에서 가져오는 것들만 심의한다. 가져오지 않는 정책을 하도록 만들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정책을 주체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 당장 이 문제를 해소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제약 아래서 성과를 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2기 민간위원 선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지난해 11월 기자 간담회에서 “민간에서는 손발이 맞는 사람을 뽑아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정부 조직에선 그럴 수 없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위원장을 맡았을 때 이미 민간위원이 구성돼 있었다. 정권 창출에 기여한 보상 때문에 온 것 아닌가 싶은 분도 일부 있고…. 그래서 ‘고생하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번엔 좀 젊은 사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전했다. 사실 4차산업위 민간위원은 회의비 정도가 주어지는 명예직이다. 굉장히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내 보겠다’는 분들이 와야 일이 된다. 그렇다고 누구를 거명해 추천한 것은 아니다.”
‘젊은 위원’을 찾는 이유는.
“혁신은 기존 질서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기존 질서에 덜 물들어 있어야 한다. 반골 기질도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젊은 분들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장병규는 …

게임업체 블루홀의 최대 주주이며 이사회 의장이다. 블루홀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배틀 그라운드’를 만든 회사다. 보유한 블루홀 주식 가치는 9300억원에 이른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과정에 다니다가 1997년 네오위즈를 창업했다. 개발한 검색엔진 ‘첫눈’을 네이버가 350억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이후 벤처 투자자로서 게임 업체를 키웠다. 블루홀도 투자한 업체 가운데 하나다. 올 5월에는 실적에 대한 보상으로 배틀 그라운드 개발자에게 최고 50억원까지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그는 “성과에 걸맞은 보상이 자본주의에서 혁신의 동인”이라고 말했다. 대구과학고를 졸업하고 KAIST 전산학과에서 학사·석사를 받았으며,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권혁주 논설위원, 변은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