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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적수에겐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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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아침마다 유력 정치인들의 집에 들러 한마디 듣고 출근하던 시절인 2001년 2월의 일이다. 대개 말이 없던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이날은 길게 말했다. “법의 목적은 정의의 실현이며 정의는 공정(fairness)을 가리킨다. A, B를 봐주고 C, D만 문제 삼는 것은 이미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며 편 ‘교통경찰론’이다.

“교통경찰이 다른 사람은 다 보내주고 특정한 사람만 법규 위반으로 잡을 경우 물론 이 사람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교통경찰도 처벌해야 한다.”

법치라면 마땅한 얘기였다. 하지만 명료한 비유 때문이었을까, ‘교통경찰’ ‘처벌’ ‘공정’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정치적 배경을 말해야겠다. DJ(김대중) 정권의 검찰이 직전에 “1996년 총선 때 신한국당에 안기부 예산 1000억원이 사용됐다”며 수사에 들어갔다. 이후 청와대·여권의 총공세 속에 칼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2005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됐다. 예산 아닌 통치자금이란 판단이었다. 민주화 지도자로 여겨지는 DJ를 두고 이 전 총재가 “체포영장 또는 구속영장이란 합법적 수단을 동원한 게 다를 뿐 야당을 적대시하고 토멸 대상으로 삶는 건 과거 정권과 다를 바 없었다”(『이회창 회고록』)고 비판한 이유 중 하나다.

17년 전 일화를 거론한 건 그런 현상을 일컫는 데 합당해 보이는 단어와 조우해서다. ‘차별적 법치주의(discriminatory legalism)’다. “친구에게는 무엇이든 다 해주고 적수는 법으로 다스리겠다!(for my friends, everything; for my enemies, the law!)”는 태도다. 미국 정치학자 커트 웨일랜드의 규정이다.

그에 따르면 차별적 법치주의를 하는 이들은 적수를 심대한 위협의 원천으로 여기고 ‘국민의 적’으로 규정하며 정치를 ‘전부 아니면 전무’의 게임으로 만든다. 측근들, 같은 진영 인사들은 지원하고 승진시키는 데 반해 적수들은 겁주거나 징벌한다. 이런 과정들이 형식적으론 법치 모양을 취해 외부자들로선 언제, 얼마나 선을 넘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또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법관들이나 의원 등 정치인들이어서 선뜻 돕겠다고 나서기가 곤란하다.

웨일랜드가 이 글을 쓸 때 염두에 둔 집단이 있다. 남미의 포퓰리스트, 그중에서도 권위주의 통치에 맞섰던 좌파 포퓰리스트들이다. 지구를 관통해야 맞닿을 먼 나라의 얘기란 의미다. 그런데 요즘 법원·검찰의 편중 인사, 그리고 각양각색의 ‘이중 잣대’를 보면 과연 먼 나라만의 얘기일까 궁금해지곤 한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