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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퍼스펙티브

“최저임금 무한대로 올려도 표에는 도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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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포퓰리즘 감별법

문재인 정부는 포퓰리즘 정부인가 아닌가.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무상 급식에 재정을 얼마나 쏟아부으면 포퓰리즘인가. 국내총생산(GDP)의 몇 퍼센트쯤인가. 얼마나 빨리, 많이 최저임금을 올리면 포퓰리스트인가. 물가상승률의 몇 배쯤인가. 이런 구체적인 잣대를 수소문했다. 관련 학계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포퓰리즘의 정의부터 분명치 않았다.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야 했다.

남미 거쳐 지구촌 휩쓴 포퓰리즘 #단골 메뉴는 최저임금 인상 #늘 수혜자가 실직자보다 많아 #경제 파탄나기 직전까지는 #임금 중간값보다 높아도 유리 #세계 학자 50년 넘게 연구했지만 #포퓰리즘 정의 아직도 모호 #그래도 깨시민 “딱 보면 알아”

1967년 5월, 런던 정경대학에 43명의 학자가 모였다. 목적은 포퓰리즘의 일반 이론 도출. 사흘에 걸쳐 ‘포퓰리즘 정의하기’(To define populism) 토론이 이어졌다. 결과는 실패. 이때 발표된 논문들을 묶어 책을 낸 어네스트 겔러 교수는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작업은 ‘신발은 있지만 거기에 맞는 발은 어디에도 없는, 신데렐라 유리구두 신세와 같다’”고 했다. 50여 년이 흘렀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포퓰리즘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저서로 꼽히는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의 저자 안 베르너 뮐러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는 포퓰리즘이 ‘좌나 우를 가리지 않으며 민주주의에 따라붙는 영원한 그림자’라며 시대·국가·분야별로 다양한 얼굴로 나타난다고 봤다. 대신 그는 반(反)엘리트, 반다원주의, 편 가르기 같은 공통점을 골라냈다. 크게 5가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① 남 탓=정책이 실패하면 과거 집권 세력 탓을 한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항상 반대자들(옛 소수 지배세력) 핑계를 댔다. 도무지 국내 탓이 어려운 사안은 미국 탓으로 돌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비슷하다. 최근 경제난을 트럼프 정부가 터키산 철강 등에 대해 보복 관세를 물렸기 때문이라며 맹비난한다. 포퓰리스트에게 적으로 삼을 대상이 동나는 적은 없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강남 아파트값이 오른 것은 전 정부가 ‘빚내서 집 사라’고 한 후유증, 소득주도성장이 효과가 없는 것은 보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며 고용 대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산업 구조조정을 못 해서”라고 한다.

② 편 가르기=친구만 국민이다. 친구에게는 무엇이든 하게 해주고, 적은 법으로 엄벌하는 ‘차별적 법치주의’를 앞세운다. 특별한 도덕적 주장은 덤이다. 차베스는 오일 달러를 나눠줘 지지세력을 결집한 뒤 반대 세력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이때 내건 주장이 만민 평등의 ‘21세기 사회주의’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내걸었다. 차별적 법치주의와 적폐 청산 기준에서 보면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청와대 업무추진비 공개는 불법,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문건 수시 공개는 정당한 게 당연하다.

③ 내로남불=야당일 때만 시스템과 제도에 반대한다. 집권하면 문제 삼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들이 통제할 제도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시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양보한 개정안에 서명하면서 “잘된 합의”라며 웃었다. 대선 공약이던 검찰 개혁도 물 건너 간 지 오래다. 한 발 더 나가 영구 집권을 꿈꾼다. 국민의 대표자는 자신들뿐이라며 당연하게 여긴다. 폴란드의 법과정의당이 ‘국민의 이익이 법에 우선한다’며 영구 집권을 목표로 삼는 게 좋은 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년을 넘어 ‘50년 집권론’을 말한다.

④ 반(反)엘리트·반다원주의=포퓰리스트는 기득권에 반대한다. 하지만 집권 후엔 똑같이 부도덕한 일을 한다. 다만 죄책감 없이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해가며 한다는 점이 다르다. 정실 인사도 당당하게 한다. ‘내가 곧 국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부패를 들춰내면 포퓰리스트를 공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도덕적·법적 흠결투성이인 유은혜를 “야당의 반대가 일반 국민의 여론이라고 하기 어렵다”며 교육수장에 당당히 임명한 이유다.

포퓰리스트는 개인적인 가치관, 좋은 삶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견해, 개인의 물질적 이해관계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정부가 고집스럽게 ‘강남의 아파트가 왜 더 비싸야 하냐’는 것과 닮았다. 미국의 원조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조지 월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편견쟁이는, 남을 편견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⑤ 후견주의=포퓰리스트는 정치적 후견주의 경향을 보인다. 대중에게 지지를 받는 대가로 유형 또는 무형의 반대급부를 지급한다. 포퓰리스트의 전유물은 물론 아니다. 세계의 많은 정당이 여·야,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자기 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와 정치 세력에 보답한다. 포퓰리스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책임진다’고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전(全) 생애 주기에 걸쳐 책임져야 한다”며 포용 국가론을 말했다.

몇 가지 특징이 겹친다고 이 정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기엔 이르다. 경제 쪽도 좀 더 따져봐야 했다. 황상연 인천대 교수는 “국민을 위한다면서 경제 정책의 기능이나 의미를 따지지 않고, 이념과 다르니 절대 안 된다고 하면 그게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소득주도성장을 말하면서 최저임금만 밀어붙이는 식이다. 소득주도성장이 성공하려면 소비도 생각하고 기업의 투자도 유도해야 하는데 친기업 정책은 정권 이념과 안 맞아 절대 안 한다 하면 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란 얘기다.

최저임금이야말로 포퓰리즘을 재는 잣대로 쓸만하다. 거의 무한정 올리더라도 최저임금은 정치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낸다. 베네수엘라·아르헨티나·그리스가 많게는 40~3000%까지 최저임금을 올린 이유다. 미국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는 “정당의 목적은 정권의 획득·유지이며 이를 위해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정책을 고안·실행하는 유인구조가 항상 존재한다”고 했다. 이를 최저임금에 적용하면 극단적으로 100명의 임금 근로자가 있을 때 최저임금 인상으로 49명이 일자리를 잃고 51명이 임금이 오르는 혜택을 보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최저임금 인상을 밀어붙일 이유가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무작정 올릴 수는 없다. 경제가 망가지고 사회 갈등이 커져 표를 얻는 것보다 잃게 되는 정치적 임계치가 존재한다. 그게 언제쯤일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계산해봤다.(관변 연구단체 소속인 전문가는 익명을 요구했다. 계산에는 최경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이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서 사용한 고용 탄력성과 방법을 적용했다.)

최저임금이 6470원에서 7530원으로 인상된 올해는 8만4120명, 8350원으로 오르는 내년에는 추가로 7만8729명의 고용이 감소해 총 16만2849명이 실직하지만, 혜택을 받는 임금 근로자(최저임금 대상자-실직자)는 157만4059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시간당 임금의 중간값인 1만3243원을 넘어 1만3375원으로 올리더라도 실직자 수는 총 77만9242명에 그친 반면 수혜자는 577만4452명으로 늘었다. 단순히 숫자로만 따지면 최저임금을 무한히 올려도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그러니 최저임금 인상이야말로 포퓰리즘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정책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고 한 말도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이 정부가 포퓰리즘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국제적인 임금 수준이나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와 관계없이 최저임금을 가파르게 계속 올리는지를 보면 된다.

포퓰리즘 권력은 더 강한 포퓰리즘에 의해서만 교체되는 속성이 있다. 고질병이 또 도져 곤욕을 치르고 있는 아르헨티나·그리스·브라질·베네수엘라·이탈리아·터키가 좋은 예다. 우리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현대경제연구원 이부형 이사는 “특정 세력, 특정 목소리가 강해지면 사회가 감내할 수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재정을 쏟아붓게 되는데 이게 표퓰리즘의 시작”이라며 “우리도 이미 포퓰리즘의 입구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그는 “브라질은 인구·자원 대국, 그리스는 관광 대국이었지만 포퓰리즘에 속수무책 무너졌다”며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왕도는 없다. 전문가들이 꼽는 대안은 꽤 있지만 공허하다. 첫째, 포퓰리즘 정책의 폐해를 자주 밝혀야 한다. 국회가 앞장서서 포퓰리즘 정책에 들어가는 재정의 장기 추계를 주기적으로 공표하는 것이다.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은 차관 시절, 여야의 포퓰리즘 정책이 가져올 국가 재앙적 재정 파괴를 구체적 숫자로 계산해 발표했다. 그 바람에 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도 받았다. 그의 기재부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둘째, 의원 입법에 재원 조달 방안을 포함하도록 하는 페이고(pay-go)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셋째, 포퓰리즘 정책에 대해 국회에 비토권을 줘야 한다. 이때 돈이 드는 모든 정책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는 게 중요하다. 100개의 정책이 있으면 최악의 정책 50개를 국회가 잘라내는 식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포퓰리즘엔 여야가 따로 없다. 야당이 막기는커녕 베끼고 더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해집단의 욕구를 충족하는 만큼 (재)집권을 위한 표 확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시민 감시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나 ‘국민’을 앞세우기 때문에 실체를 간파하기도 쉽지 않다. 양극화 해소, 저녁이 있는 삶처럼 국민 주권, 국민 감성에 호소하면 더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도 보면 안다. 전 미국 연방대법관 포터 스튜어트는 “정의할 수는 없지만 보면 안다. 포르노인지 아닌지”라고 했다. 마찬가지다. 딱 꼬집어 정의할 수는 없지만, 국민은 보면 안다. 포퓰리스트인지 아닌지. 포퓰리즘 정부인지 아닌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