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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쟁이 주장을 설계에 반영하라 요구하는 건축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16)

'미생'의 한 장면. 직장 내 갑질 등 현실적인 직장 내 문제들을 다룬 드라마다. [사진 tvN]

'미생'의 한 장면. 직장 내 갑질 등 현실적인 직장 내 문제들을 다룬 드라마다. [사진 tvN]

갑의 횡포에 대한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된다. 주로 대기업 오너 일가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이 보도된다. 갑질의 내용도 다양하고 그 수준이 상식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설마 그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영상을 보거나 녹음 내용을 듣다 보면 경악할 갑질이다. 지금은 CCTV나 각종 녹화, 녹음이 가능해 그 갑질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어디 오너 일가에 국한된 문제고 최근에만 일어난 일이겠는가.

갑을 관계에서 갑은 돈 지불하는 쪽 

갑과 을의 관계는 대개 돈을 누가 지불하느냐로 결정지어진다. 대체로 돈을 지불하는 쪽이 갑이 되는 것이다. 그럼 관점에서 우리는 자주 갑질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화점이나 테마파크에서 근무하는 젊은 직원들 대부분이 고객의 갑질을 겪어봤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불만을 트집 잡아 몰아세우는 고객이 많다. 대부분 말도 안 되거나 심지어는 고객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도 직원에게 화풀이하는 경우도 많다.

아파트 갑질 논란을 종종 볼 수 있다. 경비원이 주민으로부터 인격모독 뿐 아니라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관리비를 이용해 갑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갑질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다. [연합뉴스]

아파트 갑질 논란을 종종 볼 수 있다. 경비원이 주민으로부터 인격모독 뿐 아니라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관리비를 이용해 갑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갑질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다. [연합뉴스]

이런 진상 고객 때문에 젊은이들이 매일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으로부터 인격모독을 당하고 심지어 폭행을 당했다는 기사도 자주 본다. 관리비를 내는 갑이라고 갑질을 하는 것이다. 이런 갑질은 식당에서도 버스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해 있다.

그런데 갑도 아니면서 갑 행세를 하는 사례도 있다. 지금도 완성하게 활동 중이신 원로 건축가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다. 병원엘 갔는데, 지나가는 젊은 의사에게 무슨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의사는 자기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뻘 되는 건축가에게 짜증을 부리고 휙 지나 가버렸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 의사를 불러 세우고 따끔하게 충고를 했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나왔을 그 의사의 자질도 문제가 있지만,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갑’이기도 하다.

갑이 아닌 것이 갑 행세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도 이런 의사처럼 갑 행세를 하기도 한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공무원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만큼 자부심도 있고 자기 역할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공무원 자리를 벼슬로 여긴 이들도 있었다. 건축 인허가와 관련된 부서 공무원 중에는 갑질을 일삼기도 했다. 지금처럼 건축 인허가가 온라인으로 진행되지 않고 대면으로 진행되던 시절에는 담당 공무원의 재량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구조적 문제로 인해 건축은 불법과 부정이 만연한 분야로 낙인찍혔다. 특히 개발사업이 활발하던 시절엔 건축과 관련된 공무원 비리 사건이 많았다.

의사를 대하는 환자나 공무원을 만나는 민원인 중에 스스로 ‘을’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니 갑과 을 관계는 돈을 지불하고 받는 것이 아닌 누가 더 아쉬운가가 기준이 되는 모양이다.

건축에서 설계는 배의 방향타와도 같다.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결과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시작 단계인 설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간혹 설계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건축주의 갑질에 건축가들은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다. [사진 pixabay]

건축에서 설계는 배의 방향타와도 같다.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결과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시작 단계인 설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간혹 설계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건축주의 갑질에 건축가들은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다. [사진 pixabay]

건축설계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자질 없는 건축주의 갑질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은 법적인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장 합리적인 배치, 사용자에게 편리한 동선, 용도와 기능에 충실한 평면과 형태, 구조와 재료, 설비, 조경, 인테리어 등 복합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며 사람의 행동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만큼 건축은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건축가가 모든 분야의 지식을 다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각 분야의 전문가와 잘 조율하고 디자인에 녹여 나가야 한다.

건축가 울리는 건축주의 갑질

그러나 많은 경우 시공의 중요성은 알면서도 설계의 중요성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건축주가 많다. 때로는 설계단계를 하찮게 여기는 건축주도 있다. 건축주의 단편적인 지식으로 디자인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도 한다. 지관이나 점을 보는 사람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디자인에 적용해 달라는 건축주도 있다. 그런 경우 건축가의 디자인 역량과 의지는 사라지고 건축주의 손 역할만 하게 된다.

설계는 배의 방향타와도 같다. 출발 시점에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결과의 차이는 크게 나타난다. 바람직한 건축주, 현명한 건축주는 건축가가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도록 배려하는 건축주다. 이는 더 좋은 건축으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건축주를 만나는 것은 건축가에게도 행운이다. 갑다운 갑은 어쩌면 전문가를 전문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닐까.

손웅익 건축가 badaspac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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