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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시, 조선업 망한 자리에 미래차 성지 만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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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리셋, 한국 자동차 산업 <상>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대 항구도시인 스웨덴 예테보리. 84m 높이의 오렌지색 에릭스베리(Ericksberg) 골리앗크레인이 연간 1만1000여 대의 선박이 오가는 항구를 내려다본다.

볼보 등 기업-대학 연계 R&D 센터 #시청이 자율차 규제 푸는 데 앞장 #나라별 다른 EU 기준 통일 이끌어 #인구 43만 → 57만, 쇠락 도시 부활

바이킹의 후예 스웨덴에선 일찍이 조선 산업이 발달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골리앗크레인은 스웨덴 제조업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한국이 조선 산업의 주도권을 빼앗아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45만 명이 넘던 예테보리 인구는 도크가 빌 때마다 계속 이탈했다(2만 명 감소). 또 다른 도시 말뫼에 있던 골리앗크레인은 2002년 현대중공업에 팔려갔다.

보다 못한 예테보리시 정부는 조선업을 대체할 산업을 모색했다. 7년간의 논의 끝에 1996년 차세대 자동차 산업을 골랐다.

쓰레기 재활용 기업 레노바도 예테보리에서 자율주행트럭을 청소차로 이용하고 있다. [문희철 기자]

쓰레기 재활용 기업 레노바도 예테보리에서 자율주행트럭을 청소차로 이용하고 있다. [문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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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건 그 다음이다. 시 정부는 산업 발전의 전제가 원천기술 확보라고 봤다. 96년 린홀먼 지역의 땅을 사들였다. 당장 가시적인 장밋빛 신산업에 투자하기보다 원천기술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99년 예테보리에서 가장 번화한 도심 주거지 한가운데 미래차 기술 개발의 클러스터(린홀먼사이언스파크)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곳에서 사기업(볼보·스카니아·레노바·쉥커)은 손쉽게 지역 대학(찰머스공과대학·예테보리대학·예테보리IT대학)과 산학연구를 한다. 지자체가 미래 산업의 테이블세터 역할을 한 것이다.

민간 기업이 정부(교통청·환경관리청)·공기업(예테보리에너지·코뮨리싱·가투볼라겟)과 협업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즉각 시 정부가 나섰다. 라스 마텐슨 볼보 환경이노베이션부문 본부장은 “일찍부터 질소산화물·탄소 배출 저감 기술을 확보한 배경에는 환경당국·대학과 공동연구를 지원한 시 정부의 헌신이 자리한다”고 말했다.

국가 간 협업이 필요한 프로젝트도 총대를 멨다. 볼보트럭은 2016년 1세대 자율주행트럭 시험운행 계획을 세웠다. 스웨덴을 출발해 덴마크-독일-네덜란드 1100㎞ 구간을 가로지르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자율주행차량에 대한 4국 규제가 제각각이었다. 민간 기업의 고충을 전해 들은 시 정부는 중앙정부와 협업해 유럽연합(EU) 규제 통일에 발벗고 나섰다. 결국 볼보트럭은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각종 규제를 앞장서서 풀어내기도 했다. 마린 브로크비스트 안데르손 예테보리시 도시교통청 개발 및 국제관계국 총괄국장은 “불과 15년 전엔 전기차 도심 주행도 감전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지만 각종 규제를 풀어 혁신적인 자동차 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한 덕분에 예테보리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운행 중인 전기버스. [문희철 기자]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운행 중인 전기버스. [문희철 기자]

한때 몰락한 조선 도시였던 예테보리는 이제 미래차 메카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예테보리 시내에선 이미 4년 전부터 도로교통청·교통공사·볼보자동차가 세계 최대 규모 자율주행 도심 운행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 운전자가 없는 볼보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XC90이 시속 50㎞로 도심을 주행한다. 자율주행 쓰레기차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무인전기버스는 예테보리 시립도서관 실내에 정차한다. 전기버스는 소음이 전혀 없어 건물 내부에 버스정류장을 만들 수 있었다.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운행 중인 군집주행트럭. [문희철 기자]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운행 중인 군집주행트럭. [문희철 기자]

예테보리 스토라홀름 주행로에서는 군집주행트럭(25t 볼보 FH트럭)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달린다. 여기서 주행 중인 2세대 군집주행트럭은 군집 차로 변경이 가능하다. 즉, 맨 앞에서 주행을 하던 차량이 차로를 바꿀 때마다 뒤따라오는 차량들도 안전한 상황이 되면 저절로 차로를 바꾼다. 군집주행 규제를 시 정부가 책임지고 풀어낸 결과다. 매우 까다로운 허가를 통과한 극소수 차량만 도로 주행이 가능한 한국과 극명히 대조된다.

예테보리 북동부 볼라이든 지역에서는 광산 무인화 프로젝트가 한창이다. 위험한 폭발 물질과 유해가스가 가득한 광산에 8대의 볼보 FMX 덤프트럭이 운전자를 태우지 않고 들어간다.

하이더 오킬 볼보트럭 모빌리티·오토메이션 본부장은 “FMX 투입 후 광산 생산성이 2.2배 향상됐다”며 “발파·채굴 등 현재 사람이 수행하는 작업도 2035년까지 무인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테보리 북서부 볼보튜베공장은 10t급 자동조향식 사탕수수 수확용 자율주행차(볼보 VM트럭)를 개발했다. 브라질로 수출하는 이 자율주행차는 자동으로 농지를 왕복하면서 사탕수수를 거의 떨어뜨리지 않고 차량에 실을 수 있다. 유인 트럭을 이용하면 통상 1만㎡당 10t의 사탕수수가 손실된다.

이제 미래차 산업은 스웨덴 일자리와 경제를 살찌우는 핵심 산업이다. 13만5000명이 자동차 산업에 직접 종사하고 있고, 국가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한다. 지난해 스웨덴에서 팔린 차량의 16.9%(5만2591대)가 친환경차였다. 미래차 산업 투자로 재미를 본 스웨덴 정부는 2030년까지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전면 중단할 계획이다.

조선업 몰락 이후 감소하던 예테보리 인구는 이후 14만 명이나 늘었다(57만2870명·2016년 기준). 예테보리시청은 2030년까지 인구가 73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해안지역을 주거지역으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업 몰락으로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도시의 재생을 미래차 산업이 해낸 것이다.

스웨덴 제조업의 상징 에릭스베리 골리앗크레인.

스웨덴 제조업의 상징 에릭스베리 골리앗크레인.

시 정부가 에릭스베리 골리앗크레인을 사들일 때만 해도 ‘몰락한 산업을 잊지 말자’는 의미가 컸다. 골리앗크레인의 교훈을 잊지 않았던 스웨덴은 미래차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이 골리앗크레인은 요즘 번지점프대로 사용한다.

마린 총괄국장은 “미래차 기술은 공해 물질 배출을 줄이고 환경에 의한 인간의 사망·장애 확률(장애보정손실연수)을 크게 낮추는 데다 내연기관 엔진이 방출하는 저주파 소음 차단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며 “미래차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예테보리는 더욱 살기 좋은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테보리(스웨덴)=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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