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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돈 8000억 도박프로그램 개발···톱엔지니어의 몰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내 유명 기업에서 수준급 실력을 인정받으며 일하던 엔지니어 김모(48)씨는 우연히 사이버도박에 빠졌다.
처음엔 재미로 하던 도박이었지만, 돈을 잃기 시작하면서 베팅 액수가 커지고 빈도도 점점 잦아졌다. 결국 전 재산을 탕진하고 신용불량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있던 김씨는 서울 명문대 공대를 나온 엘리트 황모(35)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도박사이트 운영에 필요한 자체 프로그램을 개발해주면 월급 1000만원과 함께 거액의 개발비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도박으로 신용불량자 전락한 유명 기업 엔지니어, #고급카지노 영상 해킹, 도박프로그램 '마징가' 개발 #회원수 1만명에 판돈 8000억 규모 사이트 운영 #운영진 7명 구속 등 111명 무더기 검거

김씨는 결국 자신의 엔지니어링 실력을 범죄에 악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씨와 황씨는 중국의 유명 카지노호텔 그룹이 홍보를 위해 사이트에서 실시간 중계 중인 고급 카지노의 도박 영상을 해킹했다. 이 영상에 김씨가 개발한 ‘마징가’라는 프로그램을 적용해 영상의 끊김과 늘어짐 문제를 해결하고, 스마트폰에서도 영상이 구현될 수 있도록 했다.
또 이 영상을 보며 실시간 베팅까지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김씨가 제작한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 도박자들은 마징가를 통해 해당 고급 카지노에서 유명 딜러와 실제로 도박을 하는 것처럼 느끼며 생생하게 베팅을 할 수 있었다.

김씨가 제작한 자체 도박프로그램 '마징가'를 통해 구현된 온라인도박 사이트의 모습.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제공

김씨가 제작한 자체 도박프로그램 '마징가'를 통해 구현된 온라인도박 사이트의 모습.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제공

김씨로부터 이 자체 프로그램을 넘겨받은 황씨는 서울 강남에 정상 정보기술(IT)기업인 것처럼 위장 사무실을 차리고 마징가를 적용해 42개의 도박사이트를 개설했다.
브로커를 고용해 이 사이트 운영권을 분양하기도 했는데, 사이트 한 곳당 분양가 500만원에 서버비 400만원을 받았다.

김씨가 개발한 신기술 프로그램의 생생함과 인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도박자들이 몰렸고, 도박사이트 회원 수는 단기간 90%까지 늘어나면서 1만명을 넘어섰다. 치과의사 정모(63)씨 등 일부 재력가들은 마징가 프로그램으로 도박하면서 50억원에 달하는 돈을 베팅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렇게 2016년 8월부터 1년 동안 굴린 판돈은 8000억원에 달했다. 황씨는 이 돈으로 호화주택과 외제차 2대, 명품시계를 구입하며 부를 만끽했다. 김씨는 거액의 개발비를 받은 이후에도 마징가의 기능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500만~1000만원의 보수를 받았고 이 돈을 받아 다시 도박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김씨가 도박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자신의 SNS에 올린 명품시계와 현금다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제공

김씨가 도박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자신의 SNS에 올린 명품시계와 현금다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제공

이들의 지능적 범행은 1년 만에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착수한 경찰에 의해 덜미를 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불법 도박사이트를 개설해 도박한 혐의(도박공간개설)로 김씨와 황씨 일당 7명을 구속하고, 자금세탁자 및 조직폭력배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일 밝혔다. 또 이 사이트를 통해 도박을 한 치과의사 정씨 등 91명을 도박혐의로, 자금세탁을 도운 임모(50)씨 등 4명을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각각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황씨 등은 조폭을 고용해 다른 도박사이트와의 갈등관계를 해결하고, 6개의 유령법인을 만들어 수천억에 달하는 도박자금을 세탁하는 등 대기업과 같이 조직적으로 도박사이트를 운영했다"며 "A씨가 만든 프로그램은 전문가들도 놀랄 세계적 수준의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들 일당이 판돈의 약 10%인 800억원의 범죄수익금을 챙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온라인도박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신기술을 이용한 도박 프로그램이 개발돼 도박자를 유혹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상담 대상자 도박 유형별 현황'에 따르면, 온라인도박자 수는 2014년 1938명으로 전체 도박유형의 44.8%를 차지했지만, 2015년 4391명으로 급증하면서 전체 도박의 62.3%를 차지했다. 이후 2016년 4471명(67%), 2017년 5120(65.2%)으로 계속해서 늘고 있는 추세다.

경찰 관계자는 "오프라인 도박장은 경찰 단속에 노출될 우려와 신분 노출 가능성으로 도박자들이 외면하고 있지만, 사이버도박은 신분 노출 가능성이 작고 장소적 이동 없이 통신을 이용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도박자들이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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