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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전력 92% 보유 北, 1948년 5월 갑자기 전기를 끊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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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국의 전력선 자코나호가 해상에서 발전한 전기를 육상에 공급하는 모습. 48년 부산항에 투입됐던 이 선박은 55년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오키나와로 옮겼다. [위키피디아]

미국의 전력선 자코나호가 해상에서 발전한 전기를 육상에 공급하는 모습. 48년 부산항에 투입됐던 이 선박은 55년 미군 점령 하의 일본 오키나와로 옮겼다. [위키피디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56년 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과학고문인 워커 시슬러 박사와 면담하면서 원자력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그것은 만연한 전기 부족이었다. 지금이야 전기 부족이나 정전 사태를 상상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전기 부족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56년은 6·25전쟁이 53년 정전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전후 복구 시기였다. 당시 제한 송전이 보통이었으며, 툭하면 정전이 발생하는 등 전기 공급 사정이 좋지 않았다.

1961년 완성된 미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선 MH-1A의 모습. [위키피디아]

1961년 완성된 미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선 MH-1A의 모습. [위키피디아]

소련군정. 툭하면 남한에 단전 압박 

사실 그 원인은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45년 8월 해방 당시 전력 생산 설비는 거의 대부분이 38선 이북 지역에 위치했다. 45년을 기준으로 연평균 발전용량은 38선 이북이 전체의 92%에 해당하는 90만9200kw였으며, 이남은 8%인 7만9500kW에 불과했다. 해방 이전 남부와 중부 지방은 농업이 중심이었고, 북부 지방은 광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화력발전소의 주요 연료인 석탄의 생산량은 38선 이북이 전체의 79%인 568만t에 이르렀으며 이남 지역은 21%인 144만t에 불과했다. 해방 직후 중부와 남부 지역은 태생적으로 전기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51) #<3>전기 주권 일깨운 5·14 단전 #45년 한반도 전력 92% 보유했던 북한 #48년 송전 중단해 38선 이남 암흑천지 #정부 수립 앞둔 대한민국 국민 삶 타격 #미국 발전선에서 송전한 전기로 버텨 #'전력=주권' 인식 원전기술 필요성 절감

미군정, 구리·생고무 주며 달래

해방이 되고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뒤에도 북부 지방의 전기는 한동안 남쪽으로 계속 공급됐다. 아쉬운 측은 언제나 남쪽이었다. 전기가 없으면 경제 활동은 물론 기본적인 문명 생활을 누릴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전기는 전략물자였으며 경제력의 상징이었다.

해방 뒤 북부 지방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런 상황을 활용했다. 전력 자원의 ‘무기화’였다. 걸핏하면 단전을 무기로 남부와 중부 지방에 주둔한 미 군정 당국에 압력을 가했다. 이 때문에 미군정은 전기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구리나 생고무를 비롯한 잉여물자를 넘겨주는 변칙적인 방식으로 소련 군정을 무마해왔다.

3면이 바다인 남쪽이 불리 

그러다 소련 군정은 48년 5월 14일 대남 송전을 일시에 끊어버렸다. 이른바 ‘5·14 단전’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착착 진행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아무런 경고 없이 전기 공급을 일순간에 중단한 것이다. 남쪽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악용하고, 주민의 삶을 볼모로 삼은 셈이다.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38선 이남에선 그나마 있던 공장도 대부분 조업을 중단해야 했다. 도심 전차도 운행을 중지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승객을 실어 나를 수밖에 없었다. 일상생활이 마비된 것이다. 3면이 바다인 38선 이남 지역은 외부에서 전기를 공급받을 수도 없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떠다니는 발전소' 인천항 파견

미 군정은 만정적인 전력 부족 사태에 엔지니어링 능력으로 대응했다. 발전기를 탑재한 발전선(發電船) 자코나호(용량 2만kW)를 그해 2월 부산항에 정박시킨 데 이어 5월에는 6900kW 용량의 엘렉트라호를 불러와 인천항에서 발전을 시켜 육지에 공급했다. 발전선은 디젤 또는 가스터빈을 이용한 대형 발전시설을 탑재하고 전기를 생산·공급하는 특수 선박이다. 항구에 정박해 전기를 생산, 육지로 송전하기 때문에  ‘떠다니는 발전시설’ ‘이동 발전소’ ‘해상 발전기’ 등의 별명이 붙었다.

2차대전 미국 군수당국의 아이디어

발전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군 보급을 맡았던 전쟁물자생산국(War Production Board)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당시 이곳에서 근무하던 시즐러 박사 등 엔지니어과 군인들은 신속하게 현장에 배치돼 전력을 대량 공급할 수 있는 발전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개발은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맡았다. 발전선은 폭격과 교전으로 전력생산과 송전이 어려워진 점령지에 파견돼 신속하게 전력을 공급했다. 이를 통해 작전 수행에는 물론 민생 안정과 민심 확보에도 도움을 줬다. 이러한 과학기술자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은 미국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큰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미국 정부에 전력선의 한국 파견을 건의하고 이승만 대통령에세 원자 발전의 이점을 소개한 전력계 거물 워커 리 시슬러 박사.[중앙포토]

미국 정부에 전력선의 한국 파견을 건의하고 이승만 대통령에세 원자 발전의 이점을 소개한 전력계 거물 워커 리 시슬러 박사.[중앙포토]

시슬러 박사, 미 정부에 건의  

이런 발전선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은 2차대전 당시 전쟁물자생산국에서 전력공급 업무를 맡았던 시슬러 박사가 뛴 덕분이었다. 시슬러는 한국의 전력 부족과 단전 소식을 듣고 자신이 전쟁물자생산국에 근무할 때 확보했던 발전함을 신속하게 한국에 파견할 것을 미 정부에 건의했다. 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발전선의 도움과 당인리 발전소의 추가 가동 등으로 단전 사태라는 발등의 불을 급하게 끌 수 있었다. 5·14단전 사태는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 모든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전기 자립’ ‘전력 자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력선 발전기를 쥐가 갉아 먹어 사고가 나자 나머지 발전기를 과도하게 가동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해 결국 전력선 자코나가 상당 기간 마비된 사실을 보도한 1950년 2월 7일 미국 인디애나주의 지역신문 코코모 트리뷴 기사. [미국 뉴스페이퍼 닷컴]

전력선 발전기를 쥐가 갉아 먹어 사고가 나자 나머지 발전기를 과도하게 가동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해 결국 전력선 자코나가 상당 기간 마비된 사실을 보도한 1950년 2월 7일 미국 인디애나주의 지역신문 코코모 트리뷴 기사. [미국 뉴스페이퍼 닷컴]

쥐가 전선 갉아먹어 발선선 고장나기도 

이런 상황에서 50년 2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항에 정박했던 자코나호에는 두 대의 발전기가 실려 있었는데 쥐가 들어와 전선을 갉아먹으면서 한 대를 망가뜨렸다. 생산 부족을 보충하려고 남은 발전기를 과도하게 가동했더니 과열됐는지 그만 화재가 발생하고 말았다. 결국 발전기 두 대에 모두 이상이 생기면서 자코나호는 더 이상 전력을 공급하지 못했다. 한국의 전력 당국은 제한 송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악몽이었다. 쥐 한 마리가 한 나라의 밤을 깜깜하게 만든 셈이다. 정부 수립 초기에 나타난 민망한 상황이었다.

전기 갈망, 원전·기술 확보 의지로  

급기야 미국 경제협력국(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이 직접 나서서 급하게 부속을 보내고 자코나호의 발전시설을 수리하면서 간신히 전기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다. ECA는 48년 4월 신설돼 ‘마셜플랜(서유럽 전후복구를 위한 미국의 대대적 지원)’을 비롯한 대외 원조를 담당한 부서다. 전기는 문명의 기본재이며, 전력 확보는 주권 차원의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전기에 대한 갈망은 원전 확보와 기술 자립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정리=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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