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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비선 실세야” 1조원 수표 자랑하던 여성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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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 화면. 실제 사건과 관련 없음. [사진 '궁금한 이야기 Y']

재연 화면. 실제 사건과 관련 없음. [사진 '궁금한 이야기 Y']

자신을 대통령 ‘비선 실세’라고 소개하며 청와대 비서관으로 추천해주겠다고 속여 대학교수에게 2억원을 받아 가로챈 60대의 정체가 밝혀졌다. 주민등록증 발급 기록이 없어 사진도, 지문도 확인할 방법이 없던 그는 어떻게 대학교수를 속였을까.

부산 남부경찰서는 사기 혐의로 윤모(66‧여‧무직)씨를 구속했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윤씨는 자신을 박 전 대통령과 자주 만나고 김장도 해주는 최측근 비선 실세라고 속이고 2013년 6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대학교수였던 최모(61)씨에게 접근해 1억906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는다.

“언론에도 안 나온 최순실 스토리를 얘기하더라고”

[사진 SBS '궁금한 이야기 Y']

[사진 SBS '궁금한 이야기 Y']

최 교수는 28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통해 “뉴스 나오기 전 윤씨가 얘기한 것이 이튿날 뉴스로 나온다. 최순실 사건 터졌을 때도 언론에도 안 나오는 스토리를 소상히 다 얘기했다”며 윤씨를 믿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러던 윤씨는 어느 날 ‘청와대 한 번 근무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해왔다. 전부터 공직에 뜻이 있었다는 최 교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윤씨는 최 교수와의 통화에서 “(박 전 대통령이) 오늘 당 대표들하고 만나서 이야기하신 거로 알고 있어요. 주말인데 나와서 (청와대) 안에 있습니다. 지금 대통령하고 이야기하다 ‘누구하고 통화하냐’고 하셔서. 안에 들어오면 하도 도청들이 많으니까 통화를 잘 못 하게 하거든”이라며 박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또 “김기춘씨하고도 같이 있다”며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거론하기도 했다.

윤씨는 수사 과정에서도 “비서관으로 임용시켜줄 수 있었지만, 높은 분에게 누를 끼칠 수 없어 임용을 미뤄왔다. 공무원들과 연관된 것은 다 진술 거부하겠다. 그 사람들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 제가 다 떠안고 가겠다”며 박 전 대통령과 친한 사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휴가 중인데 맛있는 것 좀 사줘요”

[사진 SBS '궁금한 이야기 Y']

[사진 SBS '궁금한 이야기 Y']

최 교수는 “윤씨가 요구하는 게 많아 봐야 500만원이고 100만원, 50만원을 달라고 했다. 그게 나중에 4년이 쌓이다 보니 거의 2억 가까이 됐다”고 말했다.

윤씨는 “대통령 휴가 중이니 굴비 사주게끔 100만원을 달라” “청와대 직원들 회식하니 300만원 좀 달라” “얼른 갚을 테니 500만원만 빌려 달라”는 등의 수법으로 총 127차례에 걸쳐 돈을 갈취했다.

그러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이 없다며 하소연하는 최 교수에게 윤씨는 1조 원짜리 수표 사진을 보내며 “은행에서 바꾸면 바로 돈을 갚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배원준 위조지폐 감별 전문가는 “누가 봐도 이 수표는 진짜와 똑같이 보인다. 수표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 위조한 것”이라며 2007년 1조원 위조 수표 사기 사건에 활용됐던 수표가 다시 이용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은행권에서 발행되는 숫자는 최고가 12자리로, 13자리인 1조원 수표는 발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지하 방에 머물던 13년 전의 사기범

[사진 SBS '궁금한 이야기 Y']

[사진 SBS '궁금한 이야기 Y']

결국 ‘이건 아니다’라는 판단에 윤씨를 안 지 4년 6개월 만에 경찰서를 찾은 최 교수는 경찰로부터 “윤씨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기록조차 없어 사진, 지문, 거주지까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개월 가까운 경찰의 수사 끝에 체포된 윤씨는 아들과 함께 반지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13년 전부터 비슷한 수법으로 돈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 수배자였다.

윤씨는 2005년 ‘영부인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모 그룹 회장님이 형부다’는 등의 말로 1억 상당을 편취했다. 2011년에는 청와대 모 행정관 어머니 행세를 하며 2억 2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서울경찰청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윤씨의 거짓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말을 끊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거나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어 얘기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등의 방법으로 상대방의 의심을 사지 않는 수법이 굉장히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박동현 사회심리학자 역시 “미끼를 문 사람은 자신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지금 생각하면 한발 물러서면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그걸 왜 몰랐을까 후회스럽다”고 토로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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