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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 새벽 밝았다”지만 비핵화 협상 곳곳 디테일 악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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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호 06면

27일(현지시간) 유엔 총회를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UPI=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유엔 총회를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UPI=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가 먹히면서 교착 위기에 처했던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이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에 이어 13년 만에 세 번째로 북한 비핵화란 말을 살지는 미지수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아서다.

문 대통령 중재에 북·미 화끈한 호응 #트럼프·폼페이오, 현란한 말잔치 #교착 풀렸지만 이제부터 본게임 #주고 받기식 ‘용의’ 표명에도 #백악관, 종전선언엔 반응 안 보여 #구체적 합의점 찾기 쉽지 않을 듯

북·미 비핵화 협상 국면이 재개된 이유는 문 대통령의 ‘북한의 비핵화 구두 약속-선(先) 종전선언-후(後) 비핵화 초기 조치’ 구상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호응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18~20일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평양 공동선언에서 미국이 종전선언 등 상응 조치를 할 경우 미국이 비핵화 초기 조치로 희망해 온 핵 리스트 신고 수준을 뛰어넘어 영변 핵시설 폐기까지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판돈을 화끈하게 키운 것이다.

지난 26일(현지시간) 뉴욕 기자회견에서 본인을 ‘협상의 달인(deal guy)’이라고 자칭했던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영변 핵시설 폐기 용의 표명에 잽싸게 북한이 사찰을 수용했다는 꼬리표를 달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물론 몇 통을 받았는지도 공개하지 않은 채 김 위원장의 친서까지 흔들면서 기정사실화했다. 신고-사찰-폐기로 이어지는 비핵화 수순에서 김 위원장이 폐기할 용의가 있다면 그에 앞선 신고-사찰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나아가 같은 날 미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사찰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공식 확인하기도 했다. 27일(현지시간)엔 북한 비핵화 관련 유엔 안보리 장관급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저지하려는 과거의 외교적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제 새 시대의 새벽이 밝았다”고 정치인 출신다운 화려한 수사를 날렸다.

북·미 간의 말 퍼레이드는 중재에 나섰던 문 대통령을 어지럽게 할 정도다. 문 대통령은 미국의 ‘상응 조치’와 관련, 지난 25일(현지시간) 미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 외에 그보다 낮은 단계인 ▶대북 인도적 지원 ▶예술단 교환 등 비정치적 교류 등을 거론했다. 어떻게든 중재를 성사시켜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런데 북·미 간의 현란한 ‘말 대 말’ 퍼레이드는 이런 문 대통령의 조심스러운 접근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조건부 용의’ 표명이 곧바로 연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와 남·북·미 종전선언 채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기엔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외형상 문 대통령의 중재로 일단 북·미 협상은 재개됐지만, 구체적인 ‘내용(substance)’에 있어 합의점 찾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위성락 서울대 객원교수는 28일 중앙SUNDAY에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통해서, 또 친서를 통해서 비핵화 용의를 표명했지만, 그 용의는 일방적인 용의가 아니라 주고받기를 전제로 한 용의 표명”이라며 “실제 북·미 간에 주고받기가 가능할지는 이제부터 협상을 해봐야 안다”고 평가했다. 이르면 다음주로 예정된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네 번째 방북과 폼페이오 장관이 제안한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외무성 부상 간의 빈 협상이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 문 대통령이 신뢰구축을 위한 ‘상응 조치’로 요구한 종전선언 채택에 대해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백악관이 발표한 한·미 정상회담 성명에도 언급이 없었다. 영변 핵 시설 폐기에 앞서 김 위원장이 신고-사찰까지 수용했다면 종전선언 채택은 충분히 고려할 만한 카드인데도 말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통일안보센터장은 “미국은 북한이 이번에 내놓은 카드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고 보고 있다”며 “종전선언을 (먼저) 하면 신고-사찰(검증)-폐기 수순을 밟겠다고 북한이 수용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겠다는 게 미국의 생각이다 보니 종전선언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위 교수는 “미국이 세 번째로 비핵화라는 말을 살지, 말지를 결정할 진실의 순간은 폼페이오 장관의 네 번째 방북 이후 구체적인 주고받기를 시도할 비건 대표와 최선희 부상의 빈 협상이 될 수 있다”며 “북한이 내밀 카드에 따라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와 종전선언 채택 여부가 달려 있다”고 전망했다.

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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