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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어느 검은 개의 이야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3호 35면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나는 강원도 산골의 한 조경농장에 사는 개입니다. 주인 할아버지는 저를 보고 검돌이라고 부르지요. 저는 이제 한 살밖에 되지 않은 까만 털의 수컷이거든요. 제 엄마는 검순이라고 해요. 제 엄마는 덩치도 엄청 크고 윤기로 반짝이는 검은 털을 가지고 있지요. 털끝은 갈댓잎처럼 엷은 갈색 기운이 도는데,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을 보고 꼭 멧돼지를 닮았다고 하지요. 하긴 제 엄마 때문에 이 농장에는 고라니는 물론 멧돼지도 가까이 오질 못합니다. 지난여름 어느 날 밤, 뭣 모르고 농장 마당에 내려온 커다란 고라니도 엄마가 한입에 제압했거든요. 저는 너무 놀랐고 무서웠지만, 마당에 쓰러진 고라니를 보면서 마치 제가 사자라도 된 느낌이었어요. 이곳에 방을 얻어 살고 있는 작가 아저씨가 언젠가 제게 말해주었어요.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꼭대기에 홀로 올라가 외로이 죽은 표범 이야기를 말이지요. 몸은 다 시들었을지라도 밤마다 사자꿈을 꾸는 늙은 어부의 이야기도 들었지요.

저는 산에서 태어났어요. 이곳 봉화산 중턱에서 어머니가 저를 낳았거든요. 바위 밑 굴속에서 한 달쯤 자랐을 때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가 얼른 뛰어나갔지요. 그때부터 엄마와 저는 할아버지와 한 식구가 되었던 거예요. 우리는 할아버지가 움직이는 대로 할아버지를 종일 쫓아다니지요. 할아버지는 저희를 절대 묶어놓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산속의 둥근 달과 하얀 깨처럼 쏟아지는 별들, 점점 뚱뚱해져 가는 밤송이, 호두나무 밑에 굴을 파고 사는 두더지, 작은 연못을 제 것처럼 독차지하고 있는 물뱀, 느티나무와 그 밑에 자라는 상사화들은 전부 제 친구들이지요.

삶의 향기 9/29

삶의 향기 9/29

언젠가부터 제가 피부병에 걸려 온몸에 털이 빠지고, 진물과 피가 나서 한참 고생했는데요. 할아버지는 저를 보고 꼭 문둥병 환자 같다고 혀를 끌끌 차셨어요. 제 병이 점점 심해지자 할아버지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어요. 저도 이러다가 엄마와 영원히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로부터 며칠 후부터 할아버지는 마른 닭다리 간식과 함께 제게 이상한 알약을 아침저녁으로 주기 시작했어요. 저는 닭다리가 하도 맛있어서 그 이상하게 생긴 알약도 마구 삼켜버렸지요. 그로부터 한 삼 일쯤 지났을까요. 제 몸에 신기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핏물과 진물은 점점 멈추었고, 엉망이던 피부엔 새 살이 올라왔어요. 온몸에 빠진 털도 다시 자라기 시작했어요.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저는 예전처럼 다시 건강해졌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신나게 뛰어다니게 된 후, 갑자기 슬픈 일이 일어났답니다.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엄마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며칠 만에 돌아온 적이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엄마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밤만 되면 저는 엄마가 보고 싶어 느티나무 동산에 올라 날이 새도록 울었지요. 어느 날 아침, 작가 아저씨가 와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어요. 세상엔 너무 많은 불행들이 존재하는구나. 어젯밤에도 울다 지친 나를 아저씨가 창밖으로 내다보더군요. 오늘 아침 할아버지는 엄마를 찾으러 산으로 가셨어요. 저도 할아버지를 따라 산밤나무 우거진 숲을 함께 헤맸지요.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가 올무에 걸렸는지, 아니면 멧돼지들과 싸우다가 쓰러진 것인지 걱정하며 행여 엄마를 만나면 줄 식혜까지 챙겼지요. 그러나 할아버지가 아무리 목메어 불러도 엄마의 모습은 끝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 엄마는 표범이 되어 저 먼 별나라로 가신 건가요? 아니면 봉화산 꼭대기에서 사자 꿈을 꾸고 계신 건가요. 세상은 참 알 수 없어요.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느티나무도 지난 태풍 때는 끙끙 앓았어요. 세상에서 제일 센 엄마도 아플 때가 있는 건가요. 저를 지키던 엄마는 누가 지켜주나요.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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