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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쉬며 참고 사는 모든 어른에게 고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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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호 30면

뮤지컬 ‘마틸다’

알파벳과 음표가 그려진 알록달록 나무 블록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무대, 거대한 도서관 책장에 빼곡한 수많은 이야기책들. ‘뮤지컬’이란 세상의 알레고리로 이보다 더할 나위가 있을까. 객석에 앉으면 문자와 음악, 그리고 이야기가 만들어낸 판타지 월드로 금세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하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꼽혀온 웨스트엔드 흥행 뮤지컬 ‘마틸다’의 막이 올랐다. ‘20세기 최고의 아동문학가’로 추앙받는 로알드 달의 동화를 원작 삼아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가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 이후 25년 만에 처음 내놓은 뮤지컬이다. 2010년 초연 이후 올리비에상 7개 부문이라는 역대 최다 수상 기록과 함께 웨스트엔드 흥행 역사를 새로 쓰고 있고,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호주·뉴질랜드·아일랜드 등 영미권에서 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가장 ‘핫한’ 뮤지컬이다.

한국 공연은 ‘비영어권 최초의 라이선스 공연’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신시컴퍼니가 또다른 도약을 꿈꾸며 시도한 야심찬 기획이다. “우리 뮤지컬 관객 세대 폭을 넓혀 보고자 미래지향적 작품을 어렵게 들여왔다”는 박명성 대표의 말처럼, ‘마틸다’가 정체기에 접어든 한국 뮤지컬 시장에 ‘패밀리 뮤지컬’이라는 새 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까.

이런 중차대한 사명을 띤 ‘마틸다’는 누굴까. 어린 딸을 “더럽고 역겨운 버러지”라 부르며 “옳은 짓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게 인생철학인 부모가 지배하는 가정과 “애들은 구더기”라는 교육 이념 하에 학생들을 찍어 누르는 교장이 독재하는 학교에서 억압받고 있는 천재소녀다. ‘기득권’을 상징하는 부모와 교장은 천재소녀의 특별함을 질색한다. ‘원칙’을 지키고 ‘선’을 넘지 않아야 통제가 쉽기 때문이다. 주변엔 이런 억압과 독재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무기력한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이 있다. 하지만 5살 나이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원서로 읽는 ‘독서광’ 소녀는 다르다. ‘이야기’의 마법은 거대한 권력에 맞설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다.

우려도 있었다. ‘영국의 자존심’인 셰익스피어의 연극적 정통성을 추구하는 RSC가 또 다른 위대한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이야기로 만든 뮤지컬인 만큼, 대단히 영국적인 무대인 것이다. 영어를 사랑하고 라임과 언어유희를 좋아하는 로알드 달의 말맛을 살려 지어진 영어 노래와 대사들을 특유의 맛을 살려 번역할 수 있을까.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동화 원작의 판타지가 리얼리티를 좋아하는 한국 성인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을까.

한국판의 완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이용한 넘버 ‘School Song’부터 매끄러운 번역이 돋보였다. 알파벳을 그대로 활용했지만 마치 영어를 잔뜩 섞어쓴 힙합곡 랩 메이킹처럼 우리말과 유머러스하게 뒤섞였다. 1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4명의 마틸다와 아역 앙상블 16명의 실력도 안정적이었고, 김우형·최정원 등 성인 배우들의 서포트도 탄탄했다.

뮤지컬 장르의 매력을 십분 살린 스펙터클 무대는 남녀노소의 시청각을 고루 충족시켰다. 원작의 ‘독서광’ 소녀를 ‘이야기꾼’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 신의 한수였다. 마틸다가 무대에 앉아 책만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는 컨셉트는 또다른 이야기를 극중극으로 펼쳐내며 자칫 단순할 수 있는 무대에 깊이와 볼거리를 더했다. 마틸다가 지어낸 ‘탈출마술사와 공중곡예사의 사랑 이야기’는 소심한 담임선생님 미스 허니의 숨겨진 사연을 드러내는 복선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이 된다.

이 무대를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한다면 미스 허니 때문일 터다. 그녀는 불공평하고 부당한 상황을 애써 참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한다. 트런치불 교장이라는 거대한 기득권 세력에 압도되어 그저 충돌을 피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미스 허니’에게, 마틸다는 도발한다. 한숨 쉬며 견디는 건 답이 아니라고. 꾹꾹 참고 포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고개 꼿꼿이 들고 살라고.

‘스펙터클 뮤지컬’이라고 대단한 기술력과 특수효과가 동원된 세트는 아니다. 마틸다의 뇌구조를 형상화한 무대장치, 마틸다의 마법이나 트런치불 교장의 폭력을 표현하는 트릭도 아날로그하고 소박한 수준이다. 거대한 책장을 열고 닫으며 장면이 전환되고, 배우들이 직접 대도구를 옮긴다. 아이들이 춘향이처럼 긴 그네를 타고 객석 위까지 날아오르는 ‘When I Grow Up’, 아역과 성인 앙상블이 완벽한 합을 이루는 ‘Revolting Children’등 주요 장면이 솔로나 듀엣이 아닌 군무와 합창씬인 것도 인상적이다. 진짜 ‘스펙터클’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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