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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고향 말 고향 맛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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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호 35면

고선희 방송작가 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 서울예대 교수

전철역에서 뜻 모를 외국어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동남아 어디에선가 온 것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이 통화 중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잠시 여행 온 사람도 아니고, 아마도 타국인 이곳까지 와 돈벌이를 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쓰였다. 어디서 와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밥은 챙겨 먹고 다닐까…. 많이 피곤한 낯빛이었지만 휴대폰 너머의 누군가를 향한 그의 말소리엔 다정한 온기가 실려 있었다. “여기는 명절이라고 다들 고향에 간다는데, 당신은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냐”고, 그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왠지 그런 느낌이 든 건 순전히 내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네팔 말인지 방글라데시 말인지 모를 그 낯선 언어의 의미를 그 순간엔 그냥 알 것 같았다.

명절에 집에 가지 못하는 것만큼 많이들 공감할 설움도 드물 것이다. 오죽하면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고향 갈 차비가 부족하니 좀 도와 달라”고 하는 고전적 사기 수법이 아직도 일부 통하겠는가. 물론 차비를 좀 보태 주십사 하는 사람을 딱하게 여겨 그냥 도와줬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에는 도착하는 대로 갚겠다며 계좌번호까지 챙겨 가 소식을 끊는 명백한 사기행위가 더 많다지만, 그래도 아직 고향 가고 싶다는 말에는 마음이 더 쉽게 열리는 게 우리 대부분이다. 얼마 전에도 가까운 친구가 지방에 일 보러 갔다 오는 길에 사정이 딱한 할머니를 만났다며 나물을 잔뜩 사 왔는데, 알고 보니 다 중국산이었다. 아들 내외 주려고 직접 캐 오셨다더니…. 단골 식당 주인이 차라리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친구는 할머니가 파신 게 자신의 고향인 남쪽 땅에서 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더 서운하다고 했다. 할머니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셨을 테니 괜찮은데, 모처럼 고향 맛을 보고 싶었다는 거였다.

삶의 향기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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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우리가 명절을 기다려온 제일 큰 이유도, 고향 맛이 나는 음식을 함께 먹고 고향 말로 살아온 얘기를 하는 그런 평안한 시간들 때문인 것 같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요즘엔 명절이라고 꼭 고향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흐려지고 있지만, 그래도 그 풍성하고 손맛 가득한 음식들에 대한 기대감은 포기하기 어렵다. 한 기관이 직장인과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절반 이상이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그래도 송편과 잡채와 산적 같은 추석 음식에 대한 그리움까지 접어버린 건 아닐 거다. 부모·친척의 걱정 어린 ‘잔소리’와 ‘스트레스’가 명절 귀향 포기의 주요인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명절에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설움만큼은 모두들 피하고 싶지 않을까. 바로 그런 사정을 재빠르게 파악한 식품 업체들이 추석을 혼자 지내는 이른바 ‘혼추족’을 위한 명절 특선 도시락 제품을 다양하게 내놓았다니, 그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

고향에 가지 못해도 고향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이번에 북한이 보내온 송이버섯을 실향민 어르신들께 보내드렸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흐뭇하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고향 땅에서, 그것도 평화 교류의 상징으로 보내온 것이라니 얼마나 고맙고 귀할 것인가. 전철역 한구석에서 자신의 모국어로 길게 통화하고 있던 그 이방인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고향 말이나마 실컷 하면서 타국에서의 긴장과 피로를 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고향 말은 그리운 고향의 맛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아마 지금쯤 귀향길 고속도로 곳곳이 많이 막히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어느 소설가가 행복의 속도는 소달구지 속도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주위의 사람과 풍경 이것저것을 다 보고도 남을 만큼 천천히 가는, 그게 적당한 행복의 속도라는 거다. 그러니 너무들 스트레스받지 말고 안전하게 잘 다녀오시기 바란다, 가서 고향 말 많이 나누고 고향 맛도 많이들 보고 오시길.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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