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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트럼프가 비핵화에 급하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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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인간은 본디 자기중심적이다. 제 입장에서 세상을 보려 한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목숨이 걸린 터라 남들도 천금처럼 여길 것으로 믿기 십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어떻게든 북핵 문제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려 할 것”이란 주장이 진실처럼 도는 것도 그래서다. 꽤 그럴듯해 “미국과 북한이 곧 빅딜을 할 공산이 크다”는 논리도 여기에서 가지를 친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북핵은 관심 밖 #북·미 간 빅딜 기대로 서둘면 안 돼

과연 그럴까. 최근 워싱턴에 다녀온 한 한반도 전문가는 고개를 젓는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북핵은 주요 이슈가 아니다”고 단언한다. 유력 여론조사 회사가 1000명에게 “이번 선거 이슈는 뭔가”라고 물었더니 “북핵”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딱 3명뿐이었다고 한다. 지난 6월 미 NBC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선거의 최대 이슈는 건강보험 문제. 이어 경제·총기규제·세금·이민 순으로 뒤를 이었다. 죄다 국내문제다. 지역 일꾼인 상·하원 의원을 뽑는 데 북핵 이슈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트럼프가 북핵 문제를 이용한다면 자신의 재선 때 써먹을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올해 내에 협상을 마무리하고 내년에 비핵화 절차를 끝낸 뒤 2020년 대선 때 북핵 해결을 천명한다는 시나리오다. 지난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우리 특사단에 “트럼프의 첫 임기 내에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고 한 발언도 그래서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북한은 어떨까. 평양에서 오래 일한 중국 외교관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김정일·김정은과 중국 최고위층 간 만남에 자주 배석했다고 한다. 두 사람을 직접 보니 어땠느냐고 묻자 “모두 20~30년 앞을 내다보고 이야기하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김일성은 46년, 김정일은 17년간 통치했다. 이런 조부와 부친을 둔 김정은이 단기간에 결판을 내려 할 리 없다.

이렇듯 북·미 모두 긴 호흡으로 북핵 문제를 다룰 공산이 큰데 우리 정부만 서두른다. 특히 종전선언 문제에선 숨이 더 가쁘다. “비핵화부터 하라”는 미국과 선(先)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북한 간 기싸움으로 한반도 시계가 멈춰 서자 애가 타는 모양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일 “올해 말까지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진도를 내는 게 목표”라며 “올해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현 정권이 밀어붙이고 있지만, 종전선언 문제는 사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7년 이미 정리된 사안이다.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과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은 종전선언부터 하고 이후에 핵 폐기에 들어가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기를 쓰고 막았다. 핵 폐기를 먼저 해야지 종전선언부터 하자는 건 “마차가 말을 끄는 격”이라고 반대했다. 뒤늦게나마 노 대통령은 핵 폐기 없이는 종전선언을 포함한 평화체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결국 “종전선언에 급급할 필요가 없으니 정권을 초월한 의제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런데도 노무현 정권과 맥을 같이 하는 현 정부가 선(先) 종전선언 카드를 다시 무덤에서 불러내는 건 무슨 까닭인가. 앞으로 비핵화를 하겠다는 말만 믿고 서둘러 종전선언부터 해줬다간 무슨 낭패를 볼지 모른다.

오늘부터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자리에선 대북 경협, 종전선언 등 향후 협상 카드로 써야 할 요긴한 사안들이 논의될 것이다. 이들을 제값 못 받고 덜렁 내줘 버리면 북한을 움직일 지렛대를 잃게 된다. 착각과 조급함에 경거망동하면 우리 목숨이 달린 비핵화가 어긋날 수 있음을 문 대통령과 수행원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