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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퍼진 북한 비핵화 비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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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판타지”. 지난 12일(현지시간)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저녁 자리에서 보수당 마크 프랭코이스 의원은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이런 표현을 썼다. 그는 “북한이 핵무기를 숨기고 비핵화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용인할 수 있다”며 “자신의 어젠다가 실패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 정부가 비핵화를 인정하고 중국도 문제 삼지 않는 상황이 수년간 이어진다면 누가 이 판타지를 깰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날 자리는 영국 싱크탱크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와 킹스칼리지 런던 등의 연구자들이 북 비핵화 전망을 발표한 뒤 줄리언 루이스 하원 국방위원장이 마련했다. 영국 의원과 학자, 언론인 등이 참여했는데 비핵화 관련 비관론이 쏟아졌다. 현지 인사들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과 트럼프 대통령의 충동적 기질, 중국의 불확실한 입장 등 한반도 비핵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에 주로 주목했다.

이미 영국 하원 국방위원회는 지난 4월 김정은이 무자비하지만 이성적이어서 핵무기를 고도화한 마당에 비핵화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프랭코이스 의원은 보고서 제작에 참여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면 먼저 영국인의 탈출을 돕기 위해 해병대 역량을 제공할 것”이라며 “미국이 한국 보호에 나서면 영국도 관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영국만이 아니라 미 상원에서도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비관론은 확산하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하지 않을 경우 외교적 수단의 동력은 떨어지고 오히려 대북 압박을 계속하기 위한 여건만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전해지고 있다. 박은하 주영대사 등 한국 측 참석자들이 비핵화 대화와 남북관계 개선 투트랙에 주력하는 정부의 입장을 설파했지만 현지 인사들의 질문이 그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지만 이번 비핵화 대화의 계기는 서방이 마련한 게 아니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가족의 소개령을 트위터로 내리려 했다고 하고, 영국도 자국민 구출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들과 달리 한국은 북한의 장사정포 공격만으로도 수도권의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볼 처지다. 그래서 앞으로의 비핵화 동력도 한국이 만들어야 할 가능성이 크다. 루이스 국방위원장은 저녁 자리를 마치며 “협상은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한번 해보라는 세계를 향해 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한국 정부가 꾸준한 진전책을 도출하는 게 긴요하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