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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실패의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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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나는 아인슈타인보다 피카소 같은 학생이 좋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성실한 실패자’론이다. 최 교수는 이 둘의 천재성 발현 과정이 다름을 야구선수에게 빗댄다. 아인슈타인이 타율 따위엔 신경 쓰지 않은 채 장외홈런을 때리는 선수라면 피카소는 수없이 많은 단타를 치다 보니 만루홈런 같은 결정타를 날리게 된 선수란 거다. 주변의 젊은 과학도 가운데 ‘홈런’(성공) 한 번 못 치고 ‘지저분한 단타’(실패)만 치는 자신을 자학하는 선수에게 엄청난 다작의 피카소가 되라고 조언하는 까닭이다. 실패를 딛고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얘기다. 최 교수 나름의 ‘실패학’이다.

실패에서 배우려는 시도를 학문으로 정립한 게 실패학이다. 일본엔 실패학을 천착하는 학자가 많다. 국제실패학회 사무총장인 이이노 겐지 간사이대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어제 방한을 앞둔 그에게 e메일을 보내 ‘실패’에 대해 물었다. “실패는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실패는 시간이 지나면 종합적으로 ‘플러스’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패의 가치를 강조한다. “실패의 가치는 몰랐던 약점을 알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죠. 그러면 그 약점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닙니다.”

실패의 가치를 공유하려는 전 세계 사례는 숱하다. 미국 심리학자 새뮤얼 웨스트가 스웨덴에 연 ‘실패 박물관’이 한 예다. 보라색 케첩 같은 ‘폭망’ 제품 100개를 통해 실패를 분석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실패 공유 콘퍼런스 ‘페일콘(FailCon)’도 남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실패를 껴안고 성공을 만들자’는 게 모토다. 핀란드 헬싱키에선 매년 10월 13일 ‘실패의 날’ 행사가 열린다. 학생·교수·기업인이 모여 실패 사례를 공유하고 분석한다. 이들이 정의하는 실패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행사가 선보인다. 오늘부터 3일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실패박람회’다. 행정안전부와 중소벤처기업부가 주관한다. 실패 경험을 나누고 ‘실패를 넘어 도전으로’ 이끌자는 취지다. 최재천 교수와 이이노 겐지 교수의 ‘실패 강연’도 마련된다. 성공 신화를 좇는 세상에 실패자가 쏟아지니 사는 게 영 팍팍하다는 볼멘소리가 넘쳐난다. 오죽하면 이런 행사에 정부가 나섰을까 싶다. 그런들 무에 대수랴. 실패를 낙오로 낙인 찍지 않고 관대하게 품는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번 주말 광화문광장에 들러 볼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