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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금지된 질문-예수는 정말 물 위를 걸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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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는 늘 ‘금지된 질문’이 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배불리 먹는다.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죽은 지 사흘만에 몸소 부활하기도 한다. 이 모든 물음이 어찌 보면 ‘금지된 물음’들이다. 교회나 성당에서 섣불리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가 오히려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 “예수는 초월적인 분이야. 우리의 논리나 이성으로 알 수가 없다. 그냥 믿어. 이런 걸 묻는다는 것 자체가 네 믿음이 약함을 보여주는 거야.” 이런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스스로 물음을 거둔다. 결국 우리의 종교는 ‘묻지마 종교’가 되고 만다.

예수는 어떻게 물 위를 걸었나. 이 역시 그리스도교에서 '금지된 질문'으로 여겨지곤 한다.

예수는 어떻게 물 위를 걸었나. 이 역시 그리스도교에서 '금지된 질문'으로 여겨지곤 한다.

‘금지된 물음’은 정말 금지된 물음일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이적 일화들은 그저 예수가 ‘수퍼 히어로’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그런 그런 수퍼 영웅을 우리에게 믿게 하기 위함일까.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비밀 통로’가 숨어 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숨겨진 길, 평화와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 그런 길로 들어서게 하는 ‘비밀 통로’가 이적 일화에 숨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통로를 여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한다.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언제까지? 나의 물음이 풀릴 때까지! 우리는 ‘예수의 이적’을 궁리하고 묵상하며 파고 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의 물음이 풀릴 때 ‘비밀 통로’도 드러난다. 우리는 그 통로를 통해 또 발을 떼게 된다.

나는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파스텔처럼 호수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내렸다. 멀리 나갔던 배들도 램프를 켠 채 하나 둘 부두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시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호수의 어디쯤 가고 있었을까. 마태복음에는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라고 기록돼 있다. 요한복음에는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다’고 나와 있다. ‘스타디온(stadion)’은 고대 그리스 때 썼던 길이의 척도다. 약 185.05m다. 처음에는 185m 경주를 ‘스타디온’이라 불렀다가, 나중에는 경주를 하는 장소를 ‘스타디움(stadium)’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니 배는 호숫가에서 적어도 수㎞는 떨어진 상태였다.

갈릴리 호숫에 노을이 떨어지고 있다. 멀리 보이는 헤르몬 산의 꼭대기는 눈으로 덮여 있다. 백성호 기자

갈릴리 호숫에 노을이 떨어지고 있다. 멀리 보이는 헤르몬 산의 꼭대기는 눈으로 덮여 있다. 백성호 기자

당시 호수에는 강한 바람이 불었다. 제자들은 맞바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파도도 거세게 일었다. 그때 멀리서 무언가가 보였다. 누군가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제자들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유령이다!”라고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유령이 그들에게 말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Courage! It is I. Do not fear!)”(마가복음 6장50절) 알고 보니 예수였다.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다.

나는 호숫가에 앉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갈릴리 호수를 바라봤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예수 당시에는 돛으로 바람을 받거나, 손으로 노를 저어서 배가 움직였다. 그런데 맞바람이다. 돛을 쓸 수가 없다. 게다가 어두운 밤이다. 파도도 거셌으리라. 그러니 노를 젓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제자들은 어찌할 수 없었을 터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돛을 올릴 수도 없고, 노를 저을 수도 없다. 그런데도 파도는 거세게 몰아친다. ‘인생’이라는 배는 때때로 그런 위기를 맞는다. 그속에서 허둥대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거기에 어떤 해법이 담겨있는 걸까. 어쨌든 결과는 놀랍다. 성경은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다’고 한다. 그것이 왜 가능할까.

예수는 물 위를 걸었을 뿐 아니라 폭풍우를 잠재우기도 했다. 이런 이적 일화에는 어떤 '비밀 통로'가 숨어 있는 걸까.

예수는 물 위를 걸었을 뿐 아니라 폭풍우를 잠재우기도 했다. 이런 이적 일화에는 어떤 '비밀 통로'가 숨어 있는 걸까.

파도는 높이 솟구쳤다가 산산이 부서지고, 결국 사라진다. 그게 파도의 운명이다. 우리도 한 줌의 파도일 때는 모든 게 두렵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는 왜 “나다!(It is I)”라고 말했을까.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왜 뜬금없이 “나다!”라고 했을까. 그걸 알면 맞바람과 파도를 헤쳐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 걸까.

파도는 늘 두렵다. 그런 파도 안에도 ‘바다’가 있다. 파도의 속성과 바다의 속성은 하나다. 파도가 그 사실을 깨우치면 달라진다. 그 순간 모든 두려움이 소멸된다. 파도가 아무리 산산이 부서져도 다시 바다로 돌아감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그런 바다가 있다. 그게 뭘까.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파도는 바다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가 부른다. ‘신의 속성’이 부른다. 우리 안의 ‘바다’가 우리를 부른다. “나다! 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니. 내가 바로 네 안의 바다다.” 그렇게 우리를 부른다.

그래도 우리는 ‘바다’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친다. “유령이다. 유령이 나타났다. 유령이 나타났다고!” 그렇게 비명을 지른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도 말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마가복음 6장51절) 왜 바람이 멎었을까. 파도가 바다를 만났기 때문이다.

헨리 오사와 타너의 1907년작 '제자들이 물 위를 걷는 예수를 보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위에 예수가 서 있다.

헨리 오사와 타너의 1907년작 '제자들이 물 위를 걷는 예수를 보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위에 예수가 서 있다.

신약성서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됐다는 마가복음(기원후 70년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에서는 여기서 이야기가 멈춘다.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고,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고 기록돼 있다. 제자들은 그날 낮에 있었던 ‘오병이어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져 있었다고 한다. 여기가 이야기의 끝이다.

마가복음보다 10년 정도 후대에 작성됐다는 마태복음은 다르다. 예수가 배에 오르기 전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름 아닌 ‘물 위를 걷는 베드로’다. 산에서 기도를 마친 예수는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갔다. 배가 떠난 뒤였다. 예수는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갔다. 유령인 줄 아는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가 말했다. “오너라.”(마태복음 14장28~29절) 베드로는 배에서 내렸다. 물 위로 한 발, 또 한 발 뗐다. 놀랍게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다. 그는 예수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때 ‘강풍(strong wind)’이 불었다. 그것을 본 베드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폭풍을 보는 순간, 놓았던 에고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폭풍을 보는 순간, 놓았던 에고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궁금하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물에 빠진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게 물 위를 걷는 거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게 물에 빠지는 거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과 사망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단순화한다. 이렇게만 성경을 읽으면 아쉬워진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 담긴 영성의 울림을 맛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는 “오너라”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으며 예수에게 나아갔다(descending from the ship, Peter walks on the waters, to come to Jesus.)’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베드로는 ‘에고가 운전하는 배’에서 내렸다. 만약 베드로가 여전히 ‘에고의 운전대’를 틀어쥐고 있었다면 배에서 내릴 수 있었을까. 물 위에 발을 딛는 순간, 빠져 죽는 걸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

갈릴리 호수의 바람 속에서 나는 이 대목을 안고 눈을 감았다. 베드로는 먼저 ‘에고의 배’에서 내렸다. 나의 고집과 집착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나의 눈, 나의 관점’에서 내려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눈’에서 내려올 때 물 위를 걷게 된다. 왜 그럴까. 에고가 만든 잣대와 틀에 스스로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 위를 걸으며 우리는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에고의 운전대를 놓을 때 우주의 운전대가 드러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처럼 물 위를 걷게 된다. 삶의 온갖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를 걷게 된다.

에고의 운전대를 놓을 때 우주의 운전대가 드러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처럼 물 위를 걷게 된다. 삶의 온갖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를 걷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베드로는 다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마태복음에는 그 이유가 나와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강풍이 몰아쳤다. 복음서에는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고 돼 있다. ‘휘이익!’하는 돌풍 소리에 베드로는 덜컥 겁이 났다. 죽을까봐 말이다. 그래서 얼른 ‘에고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에 쑥 빠져들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예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장31절)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에고의 배’에서 내려온다. 그때 비로소 ‘에고의 운전대’를 놓게 된다. 그 다음에는 어찌 될까. 저절로 흐른다. 사람 속으로, 자연 속으로, 우주 속으로 저절로 흘러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말이다. 그렇게 물 위를 걷게 된다.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일까, 아니면 비유일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긴 걸까. 지금도 ‘물 위를 걷는 예수의 이적’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도 궁금한 적이 있었다. 왜 하필 물 위를 걸었을까. 눈 먼 사람을 고치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는 이적은 그래도 아주 낯설지 않다. 왠지 익숙한 일화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장면은 다르다. 상당히 독특하고 낯설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천국의 사람들은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고 믿었다. 예수가 물 위를 걷기 전에, 유대인들은 이미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천국의 사람들은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고 믿었다. 예수가 물 위를 걷기 전에, 유대인들은 이미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의 ‘음부론(陰府論)’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요세푸스는 제사장 가문의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다. ‘음부론’에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천국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천국에는 잠도 없고, 슬픔도 없고, 타락도 없고, 걱정도 없는 곳이다. 천국은 시간으로 재는 낮과 밤도 없고, 필연적 법칙에 의해 천체 사이를 움직이면서 인생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계절의 진행과 변화를 일으키는 해도 없을 뿐 아니라, 계절의 시작을 알리면서 크기를 달리하는 달도 없을 것이다.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달은 물론 작열하는 태양도 없으며, 회전하는 곰자리 별도 없으며 떠오르는 오리온자리 별도 없으며, 유리하는 수많은 별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은 여행하기에 힘이 들지 않을 것이며, 낙원의 뜰을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보행자들이 그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든 바다의 무서운 파도 소리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비록 바다에 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의인들은 쉽게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무척 넓다. 영어명도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다. 바람이 거셀 때는 지금도 높은 파도가 몰아친다. 그때는 배가 출항을 하지 않는다. 예수 당시에는 배도 작았으니, 푹풍이 더 위협적이었을 터이다. 백성호 기자

갈릴리 호수는 무척 넓다. 영어명도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다. 바람이 거셀 때는 지금도 높은 파도가 몰아친다. 그때는 배가 출항을 하지 않는다. 예수 당시에는 배도 작았으니, 푹풍이 더 위협적이었을 터이다. 백성호 기자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2000년 전,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의 풍경’이 여기에 자세히 묘사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의 설교를 향해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유대인들도 이런 생각을 가졌을 터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식으로 받아들였던 ‘천국의 풍경’‘천국의 사람’은 이런 식이었다.

2000년 전에는 아무래도 항해가 위험했을 터이다. 그러니 바다의 파도는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얼마나 무서우면 그랬을까.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의 바다에는 파도가 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파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다. 천국에 사는 의인들은 바다 위를 쉽게 걷는다고 여겼다. 그러니 2000년 전 유대인의 상식에 의하면 천국 사람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했다. 하늘 나라 사람은 물 위를 걷는 이들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이다. 그러니 천국 사람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대인의 상식에는 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바다 위를 걸어야 했다. 그러니 예수도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런 유대인의 기대를 알았기에 예수가 몸소 바다 위를 걸었던 걸까. ‘하느님의 아들’이자 천국 사람임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9세기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작품. 물 위를 걷는 예수가 베드로의 손을 잡고 있다.

9세기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작품. 물 위를 걷는 예수가 베드로의 손을 잡고 있다.

마태복음의 ‘물 위를 걷는 예수’ 일화의 마지막 구절이 눈길을 끈다.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엎드려 예수에게 절을 했다. 그리고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마태복음 14장33절) 왜 그랬을까. 예수가 물 위를 걸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이 품고 있던 ‘물 위를 걷는 천국 사람’이란 상식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물 위를 걷는 예수’에 대한 논란은 멈추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실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천국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비유를 끌어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우리에게는 어떤 걸까. ‘물 위를 걷는 예수’ 일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게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 물음을 뚫을 때, 비로소 ‘물 위를 걷는 예수’가 우리 안에서 되살아난다.

갈릴리의 밤바다는 캄캄했다. 요즘도 갈릴리 호수에는 종종 돌풍이 분다. 우리의 삶은 바다다. 거친 바다다. 예고 없이 돌풍이 몰아친다. 배가 뒤집히고, 수시로 물에 빠진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다. ‘에고의 배’를 타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도 예수는 ‘물 위를 걷는 법’을 일러준다. 그게 뭘까.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왜 물 속에 빠지기 시작한 걸까. 그의 내면에서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것은 또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걸까.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왜 물 속에 빠지기 시작한 걸까. 그의 내면에서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것은 또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걸까.

베드로처럼 우선 ‘에고의 배’에서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에고의 운전대’에서 손을 떼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렵지만은 않다. 나의 고집을 한 번 꺾고, 나의 집착을 한 번 내려놓으면 된다. 그 순간에 나의 손이 운전대에서 떨어진다. 그 다음에는 어찌해야 할까. ‘무인자율자동차’에 탄 사람처럼 ‘우주의 운전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심히 지켜보면 된다. 그럼 깨닫게 된다. 에고의 운전보다 우주의 운전이 훨씬 여유롭고 지혜로움을 말이다. 그게 바로 물 위를 걷는 일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지 못한 이유가 뭘까. 집착 때문이다. 돌픙을 보고 물에 빠져 죽을까봐 자신을 강하게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런 방식으로는 예수에게 나아갈 수가 없다. 집착을 내려놓고 물 위를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향해 나아간다. 베드로는 단순히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어 성서를 보면 문장이 더욱 명확하다. 베드로는 “제가 물 위를 걸어서 당신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명령하십시오(Order me to come toward you on the waters.)”라고 말했다. 그러니 ‘물 위를 걷는 일’이 목표가 아니다. ‘예수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 목표다. 그렇게 나아가는 방식이 ‘물 위를 걸음’이다.

물 위를 걷는다는 건 현대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걸까. 온갖 삶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물 위를 걷는다는 건 현대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걸까. 온갖 삶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베드로를 향해, 우리를 향해 예수는 지금도 말한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영어로는 “Scant of faith, why do you hesitate?”이다. “약한 믿음이여! 왜 망설이는가?” 무엇에 대한 약한 믿음일까. 그렇다. ‘우주의 운전대’에 대한 약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약해질 때 우리는 자꾸만 망설인다. 애써 놓았던 ‘에고의 운전대’를 향해 자꾸만 손이 간다.

그때마다 예수가 묻는다. “왜 망설이는가?(why do you hesitate?)”

이번 주 J팟 팟케스트 ‘백성호의 리궁수다’주제는
‘[금지된 질문들3] 예수는 정말 물 위를 걸었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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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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