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개혁의 꿈, 500년 비문으로 남다

중앙일보

입력 2006.05.16 11:07

우리 주변에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유적들이 많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집 옆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휴일 자녀들을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나기 보다 내가 사는 지역의 유적.유물을 먼저 살펴 보는 것은 어떨가. 답사를 돕기 위해 유적 및 그와 관련된 역사 인물 및 사건을 소개한다.

"신(臣)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개혁 정치가의 대명사 조광조(趙光祖:1482~1519).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결국 그는 전라도 화순의 능주로 유배 갔고, 왕은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나이 37세. 관직에 오른지 5년 만이다. 짧지만 굵었던 그의 인생은 이후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건국 후 100여년간 정국을 주도했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즉 사림파의 등장을 알렸다.

그의 묘가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다. 용인과 수원을 연결하는 43번 국도를 바로보는 구릉 위. 앞과 뒤가 아파트로 둘러싸인 곳이다. 이곳은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다.

용인엔 조선시대 유명 정치인들의 묘가 많다. 크고 작은 구릉이 많아 묘를 쓰기 좋은 데다 서울과 가까워 양반 명문가들이 묘를 돌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광조 묘 아래 쪽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들 묘가 있다. 종친 조민행(68)씨는 "조부 묘는 본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정암(靜庵.조광조 호) 일가 묘역 입구에는 수년전 세운 시비가 있다. 정암이 남긴 글이 원문과 함께 번역돼 새겨져 있다.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 (임금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섬겨 사랑하듯 하였노라/백성 돌보기를 식구 돌보듯 하였노라/밝은 태양 대지를 환히 밝혀주니/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밝다)

묘 바로 아래인 능선 중턱엔 신도비가 있다. 이 비는 정암 사후 66년 만인 1585년(선조 18년)에 제작됐다. 당대 최고의 정치가가 비 제작에 참여했다. 비문은 영의정(국무총리 해당) 노수신이 지었고, 글씨는 후일 영의정이 되는 이산해가 썼다. 이산해는 당대의 명필로 소문난 인물이다. 비문의 제목 격인 전서(篆書)는 10년 후 좌의정(현재 부총리급)이 되는 김응남이 썼다.(사진 참조)

비문의 글씨는 뚜렷하다. 그러나 육안으로 글씨를 알아 보기 쉬운 앞면과 달리, 뒷면은 이끼가 많이 끼고 마멸돼 가는 상태다. 비문에는 쉬운 한자 단어 및 문장이 여럿 눈에 띈다.홍문관,사헌부,대제학 등 조선초기 주요 관서.관직 이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가 비 전면에 보인다.

뒤면엔 정암이 사약을 받아 죽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사약을 받으며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를 말하고 있다. 용인에 장사지냈다는 내용도 보인다.

내년 말부터 이 일대서 택지 개발 공사가 시작된다. 경기도는 광교신도시 개발때 조광조 묘역(경기도지정 기념물 169 호) 을 사적공원으로 꾸밀 계획이다.

◇조광조는 '왕의 남자'였나
= 반대파 궁궐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쓴 뒤 벌레가 갉아 먹게 해 글자가 나타나자, 그것을 왕에게 보여줬다.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자가 된다. 조광조가 왕이 되기 위해 역모를 꾸민다는 얘기다.이 모함 공작이 중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며 "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고 말했다.정암은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정암은 서울서 태어났다. 17세 때 평안도 한 고을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부근에 유배 온 사림파 거두 김굉필(1454~1504)로부터 글을 배웠다. 28세 때인 1510년(중종 5년)진사시험을 장원으로 붙었다. 그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다.5년 후 32살 때 알성시 문과에 합격,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그의 관료생활은 파격의 연속이었다.5년만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현 감사원장)오르는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이후 개혁을 꿈꾸던 중종의 총애가 있어 가능했다.

정암은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그 이튿날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던가 사헌부.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됐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하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임금은 정암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놓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치적은 세가지로 요약된다.그 중 한가지 시책은 실각과 죽음을 초래했다.

첫째는 현량과(賢良科)실시다. 새로운 관리채용 방식으로 종래의 문장 및 문벌 치중서 벗어나 현실적인 정책 제시능력을 살펴 사람을 뽑는 제도다.각 정부기관 및 지방으로부터 천거를 받아 시험봤다. 합격자는 거의 조광조 일파의 신진세력들이 차지했다. 조광조 실각 후 즉시 폐지됐다.

둘째로 소격서(昭格署) 혁파를 들 수 있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던 기관이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려는 정암으로선 도교적 제천행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셋째는 중종반정의 부당한 공훈자의 공훈을 삭제하는 사건(僞勳削除)이다.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무려 76명의 훈작을 취소했다. 반대세력의 훈구파의 반발을 결정적으로 일으켰다.정암의 죽음을 몰고온 기묘사화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역사용어 해설

◇신도비(神道碑)=왕.고급 관료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라는 말은 죽은 신령이 가는 길이란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했다. 그외 유림 대학자에 대해서는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기묘사화(己卯士禍)=기묘년(1519년)에 일어난 사화다.사화란 선비(士,사림파)들이 화(禍,재앙)를 입은 사건이다. 개혁을 주도하던 조광조 중심의 신진 세력들이 조선 개국공신 후손들인 훈구파의 역공을 받아 실각했다. 개혁 조치들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림파는 4대 사화(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를 겪지만 선조 때 결국 정권을 장악한다. 이때 조광조 신도비는 세워진다.

◇중종=영화 '왕의 남자' 마지막 장면은 연산군을 내몰리는 '중종반정(反正,바른 길로 돌린다는 뜻)'을 보여준다. 박원종 등이 단행한 쿠데타로 등극한 연산군의 배다른 동생이다.훈구파 등살에 본 부인(신씨)과 헤어지는 설움을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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