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류재언의 실전협상스쿨(24)
흔히 시장이나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흥정을 한다’고 표현하지 ‘협상을 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흥정과 협상, 비슷한 듯 다른 두 개념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흥정’을 찾아보면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가격 등을 의논하는 것’이라고 정의돼 있다. 우리가 흥정할 때 대개 가격이라는 한 가지 기준을 놓고 밀고 당기기를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격이라는 한 가지 요인으로만 거래하면 필연적으로 한쪽이 얻으면 다른 한쪽은 잃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협상은 다르다. 적어도 둘 이상의 거래 조건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유형의 거래를 하더라도 누구는 흥정 수준이고, 누구는 협상 수준이다.
첨단의료장비를 개발해 의료기관에 판매하는 기업의 세일즈 담당자 A에게 의료기관의 구매팀장 C가 할인을 요구한다.
C: 다른 기업 장비는 3억 원 후반대도 있던데, 4억3000만 원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네요. 이 가격으로는 결재받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3000만 원 정도 할인해 깔끔하게 4억 원으로 계약을 진행해주세요.
A: 회사 내부적으로 가격할인 정책이 있기 때문에 3000만 원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1500만 원 정도 할인해드릴게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2500만 원을 할인해 4억500만 원에 결정됐다.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많이 할인해준 A나 생각보다 적게 할인을 받은 C, 양쪽 모두에게 썩 만족스럽지는 못한 거래였다. 상황을 바꾸어 이번에는 같은 기업의 노련한 세일즈 담당자 B에게 의료기관의 구매팀장 C가 할인을 요구한다.
C: 다른 기업 장비는 3억 원 후반대도 있던데 4억3000만 원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네요. 이 가격으로는 병원장님한테 결재받기 힘들 것 같습니다. 3000만 원 정도 할인해 깔끔하게 4억 원으로 계약 진행해주세요.
B: 기존에 다른 기업 장비도 사용해봤죠. 어땠나요. 만족스러웠나요.
C: 그럼요, 다른 장비도 사용해봤죠. 나쁘지는 않았어요. 다만 유지보수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더라고요. 매달 거의 500만 원 가까운 유지보수비용이 들어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최근 1년 동안은 사설 수리업체를 사용했었는데, 서비스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더라고요.
B: 맞습니다. 많은 의료기관이 의료장비를 구입한 후 발생하는 유지보수비용을 상당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장비 가격 할인 대신 유지보수서비스 부분에서 상당한 혜택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에 저희 장비를 구매하면서 유지보수서비스 계약을 3년 이상 체결하면, 유지보수비용을 월 400만 원까지 조정해주고, 첫 3개월은 무료로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입니다. 기존에 월 500만 원 정도를 부담했으니 첫 3개월 무료 혜택(1500만 원)에 3년간 매달 100만 원씩 비용절감 혜택(3600만 원)을 받으면, 약 5100만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A는 가격 할인에 초점을 맞춘 세일즈를 함으로써 제로섬 게임으로 귀결되는 거래를 하고 말았다. 이 경우 상당한 할인을 해주고도 거래를 통한 만족도는 양쪽 다 그다지 높지 못했다.
반면 동일한 상황에서 노련한 세일즈 담당자인 B는 직접적인 가격 할인 대신 의료기관에서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유지보수서비스 비용을 일부 조정해주는 혜택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의료기관은 처음 요구한 3000만 원 할인보다 훨씬 더 큰 비용절감 효과(5100만 원 상당)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B 입장에서는 최근 의료장비 유지보수서비스를 사설 업체로부터 받는 의료기관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3년간 유지보수서비스 계약을 확보함으로써 1억4400만 원의 추가 매출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흥정 수준의 거래를 하고, 또 누군가는 협상 수준의 거래를 한다. 흥정 수준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거래의 가치를 키워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거래로 이끄는 것, 이것이 바로 고수들의 협상 방식이다.
글로벌협상연구소장 류재언 변호사 yoolbonlaw@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