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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끔찍한 여자로 다시 태어납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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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호 14면

뮤지컬 ‘마틸다’에서 파격 변신 김우형·최재림

뮤지컬 ‘마틸다’의 ‘미스 트런치불’로 더블캐스팅된 최재림(왼쪽)과 김우형

뮤지컬 ‘마틸다’의 ‘미스 트런치불’로 더블캐스팅된 최재림(왼쪽)과 김우형

웨스트엔드 최고의 흥행 뮤지컬 ‘마틸다’(9월 8일~2019년 2월 10일 LG아트센터)가 온다. 139년 전통의 영국 최고 명문극단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레미제라블’ 이후 25년만에 제작한 두 번째 뮤지컬이다. 2011년 초연 당시 영국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올리비에상 최고뮤지컬상 등 7개 부문을 휩쓸며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고, 2013년 브로드웨이 진출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전미투어 등을 마친 검증된 무대다. 한국에선 올해 30주년을 맞은 신시컴퍼니가 아시아권 최초로 도전하는 라이선스 공연이다.

『찰리와 초콜릿공장』 등 전세계에서 2억 5000만부의 소설이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 로알드 달의 동화가 원작이지만 ‘아동용’은 아니다. 억압적인 가정과 학교에서 통제받던 천재 소녀가 기발한 재치와 마법으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드라마에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기성 권력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15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네 명의 마틸다 외에 이 무대에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건 ‘악의 축’ 미스 트런치불. 제작진이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라고 밝힌 두 명의 ‘미스 트런치불’ 김우형(37)과 최재림(33)을 만났다.

지금껏 한국 뮤지컬에 이런 캐릭터는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못생기고, 못돼먹은 미치광이 여인 ‘미스 트런치불’은 아무나 넘볼 수 있는 배역이 아니다. 신장 180cm 이상에 기계체조와 덤블링, 발레, 투포환 등이 가능한 신체능력을 갖춰야 하는 게 기본조건이다. 한국 뮤지컬 배우 중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엉뚱하게도 ‘지킬앤하이드’의 지킬,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아이다’의 라다메스 등 멋진 남주인공의 대명사 같은 김우형이 캐스팅된 이유다.

김우형

김우형

“이렇게 못생긴 역은 처음 해 봐요. 언제 또 이런 역할을 해보겠어요. 원래 변신을 좋아하지만 이런 변신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서 오디션을 봤죠. 두려움이 따르긴 해요. 관객이 제게 바라는 모습이 있으니까. 근데 그런 걸 떨쳐버리고 싶었어요. 이번 도전이 배우 경험치에 큰 보탬이 되겠죠.”(김우형)  

최재림

최재림

반면 ‘킹키부츠’의 여장남자 롤라 등 상대적으로 독특한 역할을 많이 해본 최재림에겐 맞춤옷처럼 보인다. 본인도 시종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전에 1인 3역을 한 적도 있고, 변신은 많이 해봤어요. 근데 트런치불은 인물의 결 자체가 너무나 특수해요. 관객이 어떤 반응 보여주실까, 또 내가 얼마나 즐겁게 해드릴까 기대감이 큽니다.”(최재림)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를 선보일 D데이가 다가올수록 긴장되지 않을까. 하지만 두 남자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 어린애들처럼 특수분장 떼어내는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며 즐거워했다.

“40분 정도 분장하고, 특수패딩 등 의상 입고 가발까지 쓰는데 한 시간쯤 걸려요. 특수분장이 많은데, 심지어 치아에도 분장을 하죠. 골초 캐릭터라 인체에 유해해 보이는 매니큐어같은 물질로 니코틴 코팅을 하는데, 그거 떼어내는 게 또 기술이에요.”(김우형)

“가장 뿌듯할 때가 그런 걸 다 벗겨낼 때죠. 사마귀에 털까지 나 있을 정도로 디테일한 분장을 씻어내면서, ‘오늘도 나 열심히 했다’ 싶은거죠.”(최재림)

제작진은 트런치불 선발에 가장 공을 들였다던데.
최재림 소설에 묘사된 걸 보면 가장 거대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 상상이 되는데, 그런 인물을 현실화시켜야 하니까요. 여배우중엔 그런 사람이 없으니 남자 중에 찾아야 하구요.

김우형 무대에서 마틸다의 순수함이 강조되는데, 그걸 반대방향에서 극대화시켜주는 중차대한 역할이거든요. 오디션부터 진짜 힘들었어요. 제 키가 183.7cm인데 트런치불로서는 작다는 소릴 들었고, 덤블링·기계체조도 바로 배워서 소화할 정도로 몸을 잘 써야 해요. 그보다 음악 때문에 포기할 뻔 했죠. 아리아 스타일이 아니라 악보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제가 오디션 불패 신화가 있었는데, 이번에 깨지는구나 했어요.

최재림 멜로디가 있는 듯 없는 듯, 판소리같이 주절주절 쉴 틈이 없거든요. 딱 2곡 부르지만 10분짜리 노래가 노래로 느껴지는 순간이 8마디 정도 밖에 안되요. 시원하게 지르는 게 아니라 힘을 압축시킨 걸 또 명확하게 들리게 하느라 서너 배 노력이 더 들어가죠.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아이들의 순수함을 이길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단 걸 알게 돼죠. 어른들에게 큰 선물같은 작품이 될 겁니다 (김우형)

곧 개막인데, 이제 좀 익숙해졌나요.
김우형 익숙해질 수 없는 역할인 것 같아요. 잘 되는 만족감 보다는 평범하지 않아서 항상 재밌는 쪽이죠.

최재림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연출님이 ‘너 익숙해졌구나, 이제 웃길려구 하네’라고 하셔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었죠. 외형 자체가 충격적이라 일부러 웃기려하면 안되고 최대한 절제해야 하는 캐릭터거든요.

김우형 역할 자체가 코믹이 아니라 되게 진지해요. 신념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신념 갖고 뱉는 어휘와 행동들이 웃긴 거라서 정서적으로는 진지하게 다가가야 해요. 아이들과 하는 거라 애드립이 불가능한 것도 어려움이죠. 조금만 바뀌어도 망가지니까 정확하게 주어진 계획대로 약속을 지켜야 하니 늘 바짝 긴장해야 해요.

테크닉보다 ‘커다란 진실’ 좇아야

수많은 알파벳 블록으로 채운 LG아트센터의 '마틸다' 무대

수많은 알파벳 블록으로 채운 LG아트센터의 '마틸다' 무대

두 사람은 2011년 ‘아이다’에서 처음 만났다. 김우형이 주인공 라다메스를 맡고, 최재림은 그 언더스터디였다. “그 때 형을 보며 많이 배웠거든요. 이제 더블캐스팅이 됐으니, 저도 많이 컸죠.(웃음)”(최)  

하지만 이번에 두 트런치불은 서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개성적인 무대를 보여줄 예정이다. 각 배우에 집중하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희한하게 두 배우를 한 연습실에 두지 않더군요. 보통 더블이면 내가 해석한 것과 내가 발견 못한 것의 상호작용을 즐기는데, 그 시스템을 뒤집어 생각하면 서로 다른 해석이 만나 이도저도 아닌 인물이 나온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아예 세션을 따로 잡아서 각자의 캐릭터를 구축하게 해준 것 같아요.”(최)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요.  
최재림 목소리톤 잡는 데 고생했죠. 처음에 ‘여자처럼 말해야지’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하고 갔더니, 당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하더군요.

김우형 골초 캐릭터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아서 남성화된 몸이라 굳이 여성스러운 표현은 안해도 되는데, 여자로서의 컴플렉스와 자존심은 디테일하게 갖고 가야 하는게 미묘하게 힘들어요. 대사도 살면서 거의 안 써본 말들인데, 아이에게 모욕적이고 상처받을 말들을 굉장히 노력해서 만들거든요. 그게 힘들면서도 재밌어요. 단거리 육상선수 같은 느낌이랄까. 말을 사랑하는 작가라 말이 진짜 많은데, 편안하게 얘기하는 게 없고 한마디 한마디 집중해야 하고, 노래도 가사를 생각할 틈도 없이 자동으로 튀어나와야 하죠.  

뮤지컬 ‘마틸다’ 웨스트엔드 공연 모습

뮤지컬 ‘마틸다’ 웨스트엔드 공연 모습

영국 제작진의 까다로운 주문도 있었을 것 같은데.  
최재림 ‘커다란 진실’을 좇으라는 거였죠.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잖아요. 학교에서 고전연극을 할 때도 비슷한 얘길 해요. 작품이 품고 있는 게 정의냐 우정이냐 인간의 추악함이냐, 각자의 연기가 항상 거기로 갈 때 힘이 커진다는 뜻인 것 같아요. 트런치불이 워낙 만화적 캐릭터라 액팅에 함몰되서 잃을 수 있는 걸 늘 명심해야 한다는 얘기죠.

김우형 트런치불은 테크닉적인 연기를 필요로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기술적으로 하게 되는 순간을 발견하는데, 그런 보여주기식 연기가 아니라 순간순간 진지한 연기로 발란스를 잡는게 어려워요. 트런치불의 ‘커다란 진실’요? 우리가 살면서 가끔 나쁜 짓을 할 때, 보통 나쁜 줄 알면서 하잖아요. 트런치불은 자기 행동이 나쁘다 생각 안해요. 아이들이 나쁜 것이고 자기는 맞다고 정말 믿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잖아요.

뮤지컬 ‘마틸다’ 웨스트엔드 공연 모습

뮤지컬 ‘마틸다’ 웨스트엔드 공연 모습

트런치불은 인물의 결 자체가 너무나 특수해요. 관객이 어떤 반응 보여주실까, 또 내가 얼마나 즐겁게 해드릴까 기대감이 큽니다 (최재림) 

아이보다 어른에게 선물같은 작품

혹시 ‘최악의 어른’을 연기하기 위한 모델이 있었을까. 재림은 “원래 나 자신을 끌어냈다”고 했다. “모든 어른들에게 그런 면이 있잖아요. 정말 시끄러운 아이를 보면 혼내주고 싶다는 상상을 하지 않나요. 트런치불은 행동하는 사람인거죠.”(최)

아이들 괴롭히는 캐릭터를 정말 즐기는 것 같은데.
최재림 사실은 제가 애들을 좋아해요. 근데 애들한테 장난치는 것도 좋아해서 그래요.(웃음)

김우형 재림이가 적역인 게, 트런치불의 모든 요건을 다 갖고 있어요. 못생기고, 못생기고, 못생기고.(웃음) 사실 저도 너무 신나요. 관객들이 깜짝 놀랄 테니까. 보통 팬들이 차기작을 예상하고 딱딱 맞추는데 이건 정말 예상 못하더군요. 캐스팅 발표나자 난리가 났는데, 그들도 흥미롭게 기다려주고 있어요. 너무 못 생겨서 놀랄 수도 있는데, 그간 본의 아니게 멋진 역할들만 해서 그래요. 미움 좀 받아도 돼요.  

원작 동화나 영화는 단순하고 유아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뮤지컬은 다르죠.  
최재림 2막에 ‘When I Grow Up’이란 노래가 있어요. 그 장면 볼 때마다 맘에 요동이 쳐요. 사실 전 원래 감정에 굴곡이 없는 소시오패스같은 사람인데(웃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울컥하고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 돼요. ‘어른이 되면 엄마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 엄마가 참는 것 다 할거야’라고 노래하는데, 어른에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권한으로 하려는 게 너무 아이같은 거죠. 너무나 순수하고 진실된 아이들의 시선에서 본 어른의 세계가 성인 입장에서 부럽달까. 내가 어쩌다 어른이 돼버렸지, 저런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거죠.

김우형 어린이보다 어른들 위한 작품이라는 결론을 냈어요. 저도 아이들 연습 보면서 눈물 맺힐 때가 많은데, 그들의 열정과 순수, 치열함 때문인 것 같아요.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저 순수함을 이길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단 걸 알게 돼죠. 어른들에게 큰 선물같은 작품이 될 겁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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