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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문명기행

산에선 후들거렸어도 의병장 앞장섰던 조선의 선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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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중세 서양에서 산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악마가 살고 용이 불을 뿜으며 나는 금단의 땅이었다. 우리의 산은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는 안식처였다. 북한산도 그랬다. 조선조 북한산 산행기를 보면 과거에 낙방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북한산 유람을 하는 지방 선비들의 글이 유독 많다.

신라 화랑서 조선 사대부까지 #심신수련의 청정도량이었던 산 #그윽한 문향, 우리글이었더라면 #셰익스피어 부럽지 않았을 텐데

“경진년(1880) 가을에 정시(庭試) 과거에 응시했다 합격하지 못하고 북한산 유람을 갔는데….” (이계서)

“몇 해 전 중동 별시에 조카를 데리고 벼슬길에 나아가려 했으나 뜻대로 안 되고 도성에 남아….” (정길)

이들은 대체로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 특징이 있다. 현실에서 못 이룬 아픔을 정상 정복으로 달래려 한 것일까. 지금처럼 쇠다리와 쇠난간을 붙잡고도 힘든데, 어찌 맨몸으로 바위에 매달려 올랐을까 감탄스럽다. 조선 중기의 학자 정길이 묘사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벼랑 위 나무를 잡고 오르고, 앞사람 발이 뒷사람 머리를 밟고서….”

그렇게 백운대 바로 밑 너른바위까지 올랐다. 길 안내를 한 선사가 백운대까지 마저 오르자고 권하지만, 정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가 고향 떠난 지 오래라 다리가 후들거려서….”

조선 말기의 경학자 박문호는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졌지만,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836m)를 정복했다. 그때는 정상 아래 ‘결단암’이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더 오를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두 바위 사이 1.5m 틈을 건너뛰어야 했다. 오늘날 쇠다리 놓인 곳 어디일 텐데 찾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문인인 김택영, 황현과 동행했는데, 황현이 건너지 못하고 일행의 옷가지를 지켰다. 경술국치에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선비가 바위를 무서워하다니 아이러니다. 두려움보다 부끄러움을 더 참기 힘들었던 거다. 또한 나라 잃은 치욕보다 그러고도 제 살 길만 찾는 벼슬아치들이 더욱 부끄러웠던 거다. 그의 절명시(絶命詩) 중 세 구절이 특히 가슴을 울린다.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듯하다“고 정약용이 노래한 산영루. 현재 공사 중이어서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듯하다“고 정약용이 노래한 산영루. 현재 공사 중이어서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글 읽은 사람 노릇 참으로 어려워라. 큰집(나라) 지키는데 서까래 반쪽 공도 없으니, 내 죽음 인(仁)을 이루려 함일 뿐 충(忠)은 아니로다.”

자결조차도 포장하길 거부한 것이다. 참으로 담백하고, 그래서 선비다. 예나 지금이나 노상 국가와 국민을 떠벌이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입을 다무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그러고 보니 백운대 목전에서 다리가 후들거렸던 정길도 임진왜란 때는 의병 지도자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정길뿐 아니라 당대에 산행기를 남긴 선비 중 다수가 의병을 일으켰다. 그처럼 산은 사대부들에게 심신수련의 청정도량이었던 것이다. 그 뿌리는 깊다. 김부식은 화랑도를 일컬으며 “유람하며 즐기는 산수는 먼 곳이라도 닿지 않는 곳이 없다(遊娛山水 無遠不至)”고 썼다. 실제로 화랑들은 서라벌에서 출발해 금강산까지 트래킹을 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이른바 국토순례대장정인 셈이다. 북한땅 고성의 삼일포나 강릉의 영랑호처럼 그들의 자취가 밴 지명이 여전히 남아있다.

조선의 산은 문향(文香)이 그윽한 곳이기도 했다. 사대부들은 산과 계곡에서 만나는 흥취를 시로 표현했다. 새로 짓기도 하고 차운(次韻)을 하기도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경쟁적으로 읊어댔다. 안타까운 건 죄다 오언절구, 칠언절구라는 것이다. 제 나라 말로 시를 지었다면 오늘 우리 문학의 깊이가 얼마나 더 아득해졌을까. 연암 박지원 같은 이들이 우리말로 글을 썼다면 셰익스피어가 부럽지 않을 작품이 나왔을 텐데 애석한 일이다.

시를 읊기로는 정자가 최적지다. 북한산에서는 중흥사 계곡의 산영루가 으뜸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노래한 그대로다.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듯 하구나(巖蹊纔斷見危欄 雙腋泠泠欲羽翰).”

지금의 산영루는 대홍수로 유실된 것을 2014년에 새로 올린 건데, 무슨 영문인지 또 공사 중이다. 산영루와 관련된 옛 시가 여럿 전해지는데, 내 눈엔 정조 때 벼슬을 한 무명자 윤기가 27세 때 노래한 게 가장 멋지다. 그 중 후반부 네 수다.

“승려는 석양 받으며 암자로 들어가고, 안개 뚫고 나온 새는 처마 밑에 깃드네. 사람이 명승지를 차지한다 하지 마소, 하늘이 이 바위를 만든 지 그 언제겠소(僧帶夕陽投寺崦 鳥穿煙樹上簾鉤 莫言勝地人能占 天作巖臺問幾秋).”

유수한 풍광 속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양반들이야 신선이 따로 없었겠지만, 길 시중 술 시중에 밥 시중까지 들어야 했던 상민들 속이 편치만은 않았을 터다. 특히 야밤에 졸린 눈 비비며 술병 들고 따라야 했던 동자나 사미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그들의 심통을 묘사한 글도 전해진다. 동장대(東將臺)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미가 멀리 별과 같은 불빛을 가리키며 ‘양주와 광주 지역’이라 하고, 멀리 나무가 연기 같은 곳을 가리켜서는 ‘삼척과 강릉 경계’라 했다. 공중에 텅 비어 밝은 곳에 대고는 ‘바다 기운’이라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를 능멸하는 뜻이 있었다.”

유람이 아니라 답사하듯 북한산을 샅샅이 훑은 이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아니면 누가 그러랴. 당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북한산에서) 두 밤을 자고 다섯 끼를 먹었다. 11개 사찰과, 암자·정자·누각 하나씩을 둘러봤다. (…) 시는 41편을 지었고, 암자와 사찰·정자·누각에서 각각 기행문을 썼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던가. 그런 이덕무도 틀리게 알았던 게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은 세 개다. 백운봉, 만경봉, 노적봉을 삼각산이라 부른다. 인수봉과 용암봉은 작았다.”

삼각산이라 함은 그때도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을 일컬어 불렀으며 인수봉(816m)이 노적봉(710m)보다 높다.

이훈범 논설위원

>> 9월 13일자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