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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노숙 40년, 김씨의 가방 "가장 필요한 물건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야속하리만치 무더웠던 지난 8월 1일 '김모씨 이야기' 취재팀은 서울역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노숙인들이 폭염 속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서울이 111년 관측 사상 최고 기온인 39.6도를 기록한 날이었습니다. 평소 땀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이라고 자부해 온 기자도 이날은 땀을 흠뻑 흘렸습니다.

[김모씨 이야기]서울역 노숙인 김모씨 가방을 열어보니

'어떻게 해야 이들의 일상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취재팀은 이들이 늘 갖고 다니는 가방을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몇 명이나 덮고 잤을지 추측도 안 되는 때가 잔뜩 탄 이불부터 약 봉지, 낡은 면도기, 숟가락…. 어렵게 동의를 구해 연 가방 속에는 가방 주인의 삶을 짐작케 할 물건이 하나 둘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저축도 하고 살아야죠" 이모(58)씨

◇가방 속 아이템:
속옷, 면도기, 컵, 티셔츠, 보건소 결핵검사증, 약 봉투, 칫솔, 기초수급자 인정 통지서 등

이씨의 가방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약 봉투였습니다. 서울역에 온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된 이씨는 그 전까지 알콜의존증 치료를 위해 2년 넘게 병원을 전전했다고 합니다. 퇴원한 지금은 매일 잠들기 전 한 번씩 약을 먹습니다.

이씨의 고향은 전북 전주입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올라왔습니다. 이후 일용직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알콜 의존 증세가 심해져 주민센터에서 이씨를 병원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씨의 유일한 혈육은 남동생입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 뒤 동생하고도 연락이 끊겼다고 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이씨는 가방 속에서 자랑스럽게 종이 봉투를 하나 꺼내 취재팀에게 보여줬습니다. 얼마 전 주민센터로부터 받았다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인정 통지서였습니다. 그는 조만간 노숙 생활을 청산하고 작은 돈이나마 저축을 하며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일은 안 할거냐'는 질문에는 "일 하면 수급 못 받아요"라고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수백 명은 덮었을 거야" 김모(72)씨  

◇가방 속 아이템:
큰 이불, 물, 휴지, 모자, 젓가락 등

김씨의 가방에는 커다란 이불이 들어있었습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이어도 새벽엔 쌀쌀할 때가 있어 덮고 잔다고 했습니다. 다른 노숙인들이 오면 '형제'처럼 같이 덮고 잔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이 이불을 덮은 사람만 수백 명이 넘을 거라고 그는 말합니다. 올 여름은 서울역 환승센터 쪽에 있는 나무 밑 그늘에서 휴식을 자주 취한답니다.

김씨는 서울역 노상에서 지낸 지 거의 40년째라고 합니다. 제일 필요한 물건은 '기술자격증'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공사 현장에 나가 한 푼이라도 벌고 싶지만 '노숙자'에 대한 편견으로 우리를 써주는 곳이 별로 없다"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소원? 난 그런 거 잘 몰라요" 노모(62)씨 

◇가방 속 아이템:
간식봉투, 컵라면, 물, 휴지, 수첩, 숟가락

경기도 수원에 살았다는 노씨는 4년째 서울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노씨의 가방 안에는 두툼한 간식 봉지가 들어있었습니다. 낮잠을 자고 있는데 구호단체 직원이 깨워 나눠줬다고 합니다. 이렇게 받은 식량들은 3~4번에 걸쳐 나눠 먹습니다. 가방 속에서 꺼낸 물건 중 '가장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으니 노씨는 숟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노씨에겐 아들 둘과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 이야기를 묻자 노씨는 머뭇거렸습니다. 두 아들 소식은 모르고 딸 하고는 가끔 연락을 한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에게 앞으로 소원 같은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난 그런 거 잘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사실 노숙인들의 가방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을지, 그게 무슨 의미일지 물으신다면 똑 부러진 답변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람들을 한 번쯤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회 부적응자'라며 외면하기엔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또 우리 사회의 현실이니까요.

'김모씨 이야기' 취재팀 hongsam@joongang.co.kr

이제 '김모씨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직장인 김모씨, 대학생 김모씨, 취업준비생 김모씨, 장애인 김모씨, 노숙인 김모씨, 주부 김모씨, 성소수자 김모씨….
우리는 매일 기사를 통해 수많은 김모씨를 봅니다. '김모씨 이야기'는 바로 그 '김모씨'에 주목합니다. 너무 흔해서, 너무 사소해서 무심코 지나쳤던 무수히 많은 김모씨를 돌아보고 미쳐 보지 못했던 차별·혐오·폭력을 짚어보려 합니다. 유튜브에 '김모씨 이야기'를 검색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WnyqTsk86NFkmzranBFk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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