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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온 가족이 누워 듣는 음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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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호 27면

WITH 樂: 황병기 5집 ‘달하 노피곰’

황병기 작품집 제5집 ‘달하 노피곰’. 가야금, 거문고, 대금, 여창가곡 등 다양한 음악적 성과를 망라했다.

황병기 작품집 제5집 ‘달하 노피곰’. 가야금, 거문고, 대금, 여창가곡 등 다양한 음악적 성과를 망라했다.

“내 다리 내놔!”는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드라마 명대사다. 낭만적인 대사도 많은데 왜 하필,이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길게 이어지는 더위 때문이겠거니 한다. 지하철에서 긴 머리칼을 아래로 쏟은 채 졸고 있는 여학생만 봐도 섬뜩 놀라는 내가 공포영화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날들이다.

1980년대 소년들은 한 편의 드라마 때문에 주말 저녁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 ‘전설의 고향’ 이야기다. 극이 시작되면 온 가족이 브라운관 앞에 모여 앉았다. 손에는 눈을 가릴 베개를 하나씩 쥐고 말이다. 타이틀 음악을 여전히 기억한다. 짧은 국악 선율이었다. “두르르르 두르 징”하며 함께 긴 여운과 함께 시작되었다. 첫 장면에 주로 새소리와 함께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달이 나왔다. 어린 동생은 꼴깍꼴깍 침을 삼켰고 나는 이미 얼굴 반쯤은 베개 뒤로 숨긴 뒤였다.

‘전설의 고향’ 중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내 다리 내놔” 편이었다. 산 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연고 무덤에 가서 죽은 이의 다리를 훔쳐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망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다리를 훔쳐간 이를 쫓으며 “내 다리 내 놔!”하고 외쳤다. 팔에 돋는 걸 소름이라고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당시 아이들은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뭘 제대로 볼 수나 있었겠는가? 소리와 결합된 상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올 여름은 폭염 덕에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자는 날이 많았다. 전기료 고민에서 나온 현실적 방안이었다. 오랜만에 작은 백열등 아래 가족이 누우니 아늑했다. 이럴 때 중요한 게 음악이다. 세대가 다른 이들의 음악 취향을 맞추는 것은 직장인의 점심메뉴 고르기만큼 어렵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첫째가 최근 김죽파의 가야금산조를 듣고 좋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황병기의 5집 음반 ‘달하 노피곰’을 골랐다. 대개 첫 음이 울리면 승부는 결정난다. 가야금 소리가 ‘디링’하고 청량하게 울렸다. 모두 흡족해 하는 얼굴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초등학교 저학년 둘째가 확실히 마무리 짓는다. “아빠, 끈적거리지 않고 시원해요.”

‘달하 노피곰’에 수록된 곡들은 왕왕 대는 늦여름의 매미소리를 물리칠 만큼 시원하다. 앨범에는 가야금곡 외에도 거문고와 대금, 강권순이 부르는 노래 등 다양한 창작곡이 들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은 12현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하마단’이다. 제목은 페르시아의 오래된 도시에서 따왔다.

이 곡을 들으면 “사구 꼭대기에 그들이 나타났다”로 시작되는 르 클레지오의 소설 『사막』이 생각난다. 바람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원시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던 청색 인간들의 모습이 음악 속에서 연상된다. 황병기의 음악이 품고 있는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만이 아니라는 점에도 확신이 선다. 대륙의 저편, 그곳에서 맑고 고요하게 흐르는 생명의 에너지를 우리가 세계와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면 세계는 한 뼘 정도 가까워진 것 같고 낯선 언어의 이방인들과도 인생의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렇게 운치 있게 잠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만 장난기가 발동해서 “내 다리 내놔”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말았다. 아이들은 좀 전까지 좋다던 음악이 무섭다며 끄라고 난리였다. 특히 대금 연주곡 ‘자시(子時)’가 문제였다. 무반주 대금에 혀 떠는 소리가 더해진 음향은 으스스했다. 결말이 좀 그렇지만 가족들이 함께 모여 자는 여름밤은 추억 만들기에 좋다. 그나저나 그 사이 날씨가 조금 서늘해진 것 같은데 음악 때문인가. 혹시 “내 다리 내놔” 때문에.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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