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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포도 한 알 느끼고 씹고 삼키기 10분, 마음이 깨어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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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호 11면

배영대의 명상만리

바쁜 도시를 벗어나 확트인 자연에서 심호흡 한번 해보자. 명상은 편안한 호흡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도 할 수 있다. 사진은 1999년 문을 연 요가명상센터 ‘리탐빌’ 회원들의 명상 장면. [사진 리탐빌]

바쁜 도시를 벗어나 확트인 자연에서 심호흡 한번 해보자. 명상은 편안한 호흡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도 할 수 있다. 사진은 1999년 문을 연 요가명상센터 ‘리탐빌’ 회원들의 명상 장면. [사진 리탐빌]

내 손바닥 위에는 지금 건포도 한 알이 놓여 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특별한 맛이 있어서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건포도의 겉면이 번들거린다. 좀 더 자세히 보니 작은 홈이 보였다. 포도나무에 걸려 있을 때 벌레가 파먹으며 생긴 것일까, 아니면 유통 과정에 흔들리고 부딪치며 생긴 흠일까. 건포도를 입에 넣었다. 주름이 잔뜩 진 이 작은 물질을 혀로 굴려 보았다. 몇 분 후 오른쪽 위아래 어금니 사이에 놓고 천천히 씹어 본다.

‘명상은 특별한 수행’ 선입견 깨쳐 #종교인이나 전문가 전유물 아닌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할 수 있어 #잡념을 일념으로 대체하는 수련 #과거·미래 아닌 ‘지금 여기’ 집중 #긍정적 통찰력, 타인·사회로 퍼져

건포도에 대한 관찰이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마음챙김 명상 수업 첫 시간에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왜 건포도일까. 건포도가 흔히 구할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건포도 명상’을 세계적으로 퍼트린 이는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병원의 존 카밧진 교수. 1979년 개발한 8주간 명상 프로그램 ‘MBSR’을 통해서다. 명상이라고 하면 특정 종교인에 의해 진행되는 아주 특별한 방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 이 방법을 도입했다고 한다.

◆스트레스와 마음챙김=이 방법은 건포도를 소재로 한 일종의 ‘먹기 명상’이기도 하다. 건포도에 주의력을 기울이며 누구나 쉽게 명상을 체험해 볼 수 있게 한다. 건포도가 아니어도 된다. 소재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땅콩이면 어떻고, 초콜릿이면 어떤가.

안희영 소장과 존 카밧진 교수

안희영 소장과 존 카밧진 교수

한국MBSR연구소 안희영 소장도 이 방법을 사용한다. 미국 MBSR본부의 공인지도자 자격을 받은 그는 한국에서도 건포도를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수업에서도 건포도를 쓰고 있지만 다른 소재를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오감을 통해 느끼고 씹고 삼키고… 10분 정도 건포도를 가지고 명상을 해보는 거죠. 평상시 하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 명상에 대한 개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명상이 어렵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으며,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 기분이 달라지고 몸과 마음이 달라지는 경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소재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일이다. 자각의 방법으로 카밧진이 개발한 MBSR은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의 약자다. 번역하면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다. 그 고통의 근원은 마음에 있고, 치유의 비결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는 현대 명상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뇌과학의 발달은 명상의 효과를 입증해주고 있다.

안 소장은 본래 영문과 교수였다. 10여 년 영어를 가르치다가 90년대 말 풀부라이트 교환교수로 미국 뉴욕대학에 갔을 때 마음챙김 명상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인생 터닝포인트였다. 고교 시절부터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해왔지만 MBSR은 그때까지 알고 있던 명상과 달랐다고 한다. 서구의 심리학·의학 분야의 과학적 연구가 뒷받침되는 가운데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8주 프로그램으로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카밧진 교수에게서 MBSR을 오랫동안 배우고 컬럼비아대학에서 MBSR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어학 박사에 이어 두 번째 박사학위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각이라는 마음챙김, 즉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깨어있는 마음은 학생이나 기업인, 노동자, 주부, 환자, 전문가 등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다 필요합니다. 소수의 수행자나 종교인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어요.”

◆잡념과 일념=명상을 하면 생각을 모두 없애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마음챙김은 생각을 모두 다 없애는 것이 아니다. 없애야 할 것은 잡념이다. 잡념이란 대개 과거와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분노,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걱정 등으로 우리의 마음속이 혼란스럽다.

명상은 잡념의 자리를 하나의 생각, 즉 일념으로 대체하는 의도적 수련으로 정의된다. 이를 통해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한다. 마음챙김 명상은 그 어떤 ‘신비한 비결’도 제시하지 않는다. MBSR을 만든 카밧진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것”을 권할 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재’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며, 일념의 집중을 위한 소재로 건포도까지 사용하는 것이다.

안 소장은 마음에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생각의 차원’이다. 우리 인간은 대개 이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생각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명상을 하면 그 생각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 마음에는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자각의 차원’이다. 자각(알아차림)은 생각의 차원에서 빠져나와 나의 생각 그 자체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이 곧 마음챙김 명상이다.

마음챙김 명상을 전파하는 저명인사인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도 마음의 ‘두 세계’를 언급했다. 하나는 깨어남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명(無明)의 세계다. 자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면, 무명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깨어남의 세계에서 살 때 우리는 날마다 행복할 것”이라며 “왜 그쪽을 선택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명상의 진정한 가치=명상이 확산되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은 사회로 바뀌어 갈 것인가. 명상을 한다고 해서 자기 개인의 문제에만 몰두하고 사회적 이슈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명상은 개인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개인성을 사회성으로 확장해나가려고 한다. 일종의 사회운동도 모색한다.

마음챙김 명상의 또 다른 이름은 ‘통찰(Insight) 명상’.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명상을 통해 삶에 대한 긍정적 통찰력을 얻는다고 해서 붙여졌다. 미국에서 일찍부터 통찰 명상 모임을 이끌어온 심리학자 잭 콘필드 박사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명상의 보다 큰 목적은 자신이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고 삶의 어떤 장면도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 소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명상의 진정한 가치는 개인의 변화를 시작으로 조직의 변화, 궁극적으로 사회와 세계의 변화에 있다”며 “회사나 조직 안에 마음챙김을 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말하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어 갈 것”이라고 했다. 나만 알던 사람이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점점 열리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도 생각해보게 되고, 그런 사람이 하나둘 모인 조직이 늘어나면 사회가 변하고 결국 나라가 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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