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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국밥 먹으며 미안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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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호 18면

비행산수 시즌2 ⑪ ‘무진기행’ 순천

비행산수 순천

비행산수 순천

순천 가는 길에 선암사에 먼저 들렀다. 절집으로 올라가는데 비가 내린다. 젖어가는 흙길 위로 숲이 뿜어내는 선한 기운이 가득하다. 장경각 앞에 우뚝 선 삼나무 두 그루는 볼수록 장하다. 이 절집은 지난 6월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주지 스님은 “그렇잖아도 좋은 절”이라며 새삼스럽지 않다는 표정이다. 통도사 부석사 법주사 마곡사 대흥사 봉정사와 함께 등재됐다. 상사호와 낙안읍성을 거쳐 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간다.

순천의 원도심인 부읍성 자리는 난봉산과 봉화산 사이에 끼어있다. 쇠락했던 동네가 ‘문화의 거리’로 새 단장을 하며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다. 매산등 언덕으로 이어 지는 길에는 족보 있는 근대건축물인 교회·병원·학교들이 줄지어있다. 이끼 낀 기와를 이고 있는 매산중학교 돌담길 앞에서 발길을 한참 멈췄다. 근대 호남 동부지역 선교의 중심이라 그럴까, 순천 시민 36%가 기독교인이란다. 인구가 늘며 도심은 봉화산을 남으로 돌아 동쪽까지 넓어졌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여수, 광양, 구례, 곡성, 벌교의 물산이 순천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두 개의 5일장은 대형마트보다 사람이 북적인다. 아랫장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다. 웃장 제일식당에서 맑은 국물의 순대국밥을 주문하니 수육 한 접시가 따라 나온다. 2인분 이상 시키면 서비스로 준다는데 이리 내도 남을까 싶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에 이렇게 썼다. 작가의 고향인 이 곳이 배경일 텐데, 안개 자욱하던 순천은 국가정원과 습지 덕에 생태문화의 대명사가 돼 있다.

여기서 나고 자란 배일동 명창은 그래도 고생스럽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이제 내 부모님이나 당숙 세대 분들이 더 신식이 됐어요. 나는 아직도 어릴 때 들으며 자란 노랫가락 ‘목포의 눈물’을 품고 그리며 사는데, 이 양반들은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더 즐겨 부르고, 나보고 구식이라고 하니 알쏭달쏭해요. 고향의 흙은 옛날 그 흙인데 사람이 변해서 흙도 변한 것 같네요. 어디 내 고향만 그럴까요. 천지가 그 모양이죠. 허허.”

그림·글=안충기 기자·화가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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