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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풍경 드론으로 내려다 보니…그곳에 인생이 있었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30)

산악사진가에서 드론작가로 변신한 정용권씨. [사진 김순근]

산악사진가에서 드론작가로 변신한 정용권씨. [사진 김순근]

흔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한다. 만나고 헤어짐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인연뿐 아니라 무언가에 푹 빠지는 ‘인연’도 때가 되면 자연스레 오는 것 같다. 산악사진가에서 드론촬영 전문가로 변신한 정용권 씨(58)의 경우도 그렇다.

“드론을 통해 내려다본 세상, 그것은 20여 년 전 헬리콥터를 타고 히말라야 연봉들을 촬영할 때 느꼈던 감동이었습니다. 그 감동이 저를 드론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던 평범한 직장인에서 히말라야 등정을 계기로 산악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변신한 뒤 숱한 인생역정을 경험한 정용권 씨는 50대 중반에 접한 드론을 통해 또다시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히말라야 등정 후 산악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변신

평창 용구니 아지트 전경. 하얀색 돔이 교육장 및 휴식공간이다. [사진 정용권]

평창 용구니 아지트 전경. 하얀색 돔이 교육장 및 휴식공간이다. [사진 정용권]

그의 현재 직업은 강원도 평창군 옛 화전민이 살던 가옥을 개조한 ‘용구니 아지트’ 지기다. 사장 겸 직원으로 일인다역이다. 정 씨는 올여름이 되기 전 경기도 양평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람이 가장 평온함을 느낀다는 높이인 해발 700m 자락에서 111년만의 무더위에도 선선한 여름을 보냈으니 말 그대로 ‘해피 700’을 실감하고 있다. 게다가 매일 아침, 저녁 집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드론을 통해 만나며 또 다른 행복을 느끼며 즐거운 미래를 꿈꾼다.

그에겐 아주 오랜만에 가져보는 행복감이다. 그만큼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직장에서 사진촬영 관련 업무를 하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정 씨. 한국외국어대학 산악부 출신인지라 직장에 다니면서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꿈꾸는 작은 소망인 히말라야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96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산악부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히말라야를 가게 됐다. 촬영 대상은 아마다블람(6812m)이었다. 꿈은 달콤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푸른 하늘과 하얀 설산이 전부인 그곳에 발을 디딘 후 고소증세와 싸우면서 등반과정을 빠짐없이 남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더 좋은 장면을 담으려는 욕심에 위험한 순간도 겪었다.

2003년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 함께한 73일간 북극 원정시 리드(얼음이 갈라져 바닷물이 드러난 곳)를 건너는 원정대 모습. [사진 정용권]

2003년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 함께한 73일간 북극 원정시 리드(얼음이 갈라져 바닷물이 드러난 곳)를 건너는 원정대 모습. [사진 정용권]

그러나 이 낯선 여행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인생 항로를 180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고산 등반 사진작가로 알려지면서 유명 산악인들의 원정에 동참하게 된 것. 지금은 고인이 된 산악인 박영석 대장과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마나슬루(8163m), 낭가파르밧( 8125m), 마칼루(8463m), 시샤팡마(8027m) 등반을 함께했다. 2004년에는 엄홍길 대장과 얄룽캉(8505m) 등반을 함께하며 등반과정 전 기록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당시 히말라야 연봉 중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했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 장엄한 풍경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한컷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담기 위해 기장과의 호흡을 맞추려 애썼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2003년 박영석 대장과 북극 탐험에 나섰을 때 헬기에서 꽁꽁 얼어붙은 북극 얼음을 카메라에 담을 때는 소름 끼치는 감동마저 밀려들었다. 이처럼 하늘에서 바라본 앵글은 땅에서만 보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나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2004년, 2~3개월에 걸친 엄홍길 대장의 얄룽캉 등반을 앞두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장기휴가를 허락하지 않아 등반에 동참하느냐 회사를 관두느냐의 갈림길에서였다. 결국 그는 사표를 내던지고 모험을 택했다.

산악 사진가 꿈 접게 한 아내의 사망

하지만 다시 돌아온 일상은 녹록지 않았다. 이후 식당, 등산용품점 운영, 등산업체 직원, 전문직 공무원 등 많은 직업 전 변을 거쳤다. 그러는 사이 2007년 산악부 후배이자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를 불의의 산악 사고로 떠나보내면서 온갖 역경 속에서도 당당했던 정 씨는 심적으로 흔들리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게다가 2011년에는 히말라야에서 여러 해 같이 등반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안나푸르나 등정 도중 실종되면서 산악 사진가로 돌아갈 꿈도 접었다.

망망대해에 항로를 잃고 떠 있는 배처럼 시간과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오던 정 씨에게 숨어있던 도전정신을 일깨우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드론이었다. 2013년 우연히 드론을 접했다. 하늘에 높이 뜬 드론이 보내는 영상을 모니터를 통해 바라본 정 씨는 흑백사진처럼 아련하게 남아있던 히말라야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드론에서 새로운 꿈을 찾아 행복한 인생 3막을 시작한 정용권씨. [사진 김순근]

드론에서 새로운 꿈을 찾아 행복한 인생 3막을 시작한 정용권씨. [사진 김순근]

“신비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알 수 없는 희망이 되살아났고, 드론 조종술을 익히면 내가 원하는 각도의 영상을 마음껏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연인을 만났다고 할까. 단박에 드론과 사랑에 빠졌다. 곧바로 드론을 구매하고 전문가를 찾아 드론 비행·촬영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히말라야로 처음 떠날 때의 그 설렘이었다. 신이 나니 배우는 게 즐거웠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 유명 드론사진가의 촬영노하우를 익히고 그들이 찍은 영상을 보면서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게 큰 도움이 됐다.

비행시간이 늘어날수록 하늘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의 품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드론과의 데이트는 행복 그 자체였다. 아이맥(iMac)으로 편집하는 기술까지 배웠다. 혼자 드론 영상을 찍고 편집하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차츰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지인 및 전문가들과 촬영한 사진·영상을 공유하는 등 드론은 정 씨의 일상이 됐다.

그렇게 드론에 푹 빠져 지내던 정 씨는 어느 날 지방의 한 축제현장을 찾았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현장에서 하늘 위를 곡예 하듯 날아다니는 드론을 보며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작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폭탄을 싣지 않더라도 드론 자체가 폭탄이 될 수 있으니까요.”

드론의 이륙 전 기체 무게는 1~2kg(DJI 팬텀 기종 이하). 그런데 비행 시 프로펠러의 회전수가 엄청난 데다 비행 중 고장이 나면 자유낙하에 의해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만약 많은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드론을 취미생활로 즐기려던 정 씨의 마음을 바꿨다. 드론의 대중화를 앞두고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히말라야 등정 시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깨달은 교훈이 안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기에 더욱 그랬다.
“조종법을 제대로 익힌다면 좀 더 안전하고 멋진 비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저부터 교육을 받기로 했어요”

경력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드론을 신체의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베테랑이 됐지만, 안전문제에 대한 제도권의 정식교육이 필요했다.

드론 안전 파수꾼으로 새 꿈 펼쳐

드론 교육중인 정용권씨. [사진 김순근]

드론 교육중인 정용권씨. [사진 김순근]

그래서 2015년 항공대에서 진행하는 드론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나아가 2018년에는 전문학원에 등록해 25kg 대형기체를 운용할 수 있는 자격증(초경량비행장치 무인멀티콥터)을 취득하며 실력을 공인받았다. 그동안 쌓은 드론촬영 노하우와 특히 지난 5년간 실전을 통해 터득한 안전한 드론 비행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일반인에게 드론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정 씨는 자격증을 따기 전인 작년 가을부터 드론강의를 하기 위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끝에 강원도 평창역에서 5분 거리로 접근성이 좋은 2310㎡ 규모의 옛 화전민 가옥에 터를 잡게 됐다. 주변에 넓게 펼쳐진 양배추밭은 좋은 드론 교육장일 뿐 아니라 겨울에는 눈썰매장으로 그만일 것으로 생각했다.

드론 강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정 씨는 이곳을 ‘용구니 아지트’라 이름 짓고 드론 교육장과 민박체험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옛집을 수리해 구들장이 있는 온돌방 2개를 만들고, 뒤편에는 드론 교육장으로 활용될 10여평 규모의 돔 강의장과 캠핑시설도 마련했다.

드론으로 별이 된 사람들과 교감 

“‘용구니 아지트’는 드론도 배우고 민박체험도 하면서 가끔은 캠핑을 통해 밤하늘 별을 보며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돌고 돌아 다시 사진으로 돌아오게 한 드론을 통해 인생 3막의 즐거운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별이 쏟아지는 용구니 아지트 밤풍경. [사진 정용권]

별이 쏟아지는 용구니 아지트 밤풍경. [사진 정용권]

밤하늘 별이 유난히 반짝일 때 드론을 하늘 높이 띄우며 지금은 별이 된 그리운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정용권 씨는 “집 앞으로 멋진 능선 7개가 한눈에 늘어오고 붉은 일몰이 너무나 아름답다”며 “무엇보다 드론을 통해 이 아름다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게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순근 여행작가 sk4340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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