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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당사자외 촉수금지 자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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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윤호 기자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대표
남윤호 도쿄 총국장

남윤호 도쿄 총국장

요즘 도쿄에 온 한국 기업인을 만나면 푸념 일색이다. 끈적끈적 조여드는 규제, 난폭한 최저임금 인상, 과도한 경영간섭, 그리고 계속 가라앉는 경기. 그들에게 J노믹스는 J슬럼프와 동의어가 됐다. 이젠 정부의 재정투입도 불안해한다. 나라살림을 염려하는 게 아니다. 재정을 쏟아부어도 효과가 없을 게 뻔하니 또 기업 쥐어짜지 않겠나 하는 얘기다.

사내유보 풀어 경기 띄우려는 시도 #과거 정부도 했지만 별 효과 없어 #용도는 기업이 알아서 정할 일 #오해 부르는 용어도 바꿔볼만

떠오르는 타깃은 사내유보다. 여당은 툭하면 사내유보에 부정적인 언급을 한다. 외곽에선 운동단체가 시비를 건다. 원래 기업 돈이 아니라 서민 몫이라며 환수하자고 선동한다. 그들의 주특기인 선악 프레임이다. 관군으로 안 되면 의병이 궐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관군이 못났으면 의병을 모셔와야지 고압적으로 징발할 수 있나.

선동이 통하는 건 오해 탓이다. 사내유보가 1조원 있다 해서 회사통장에 1조원이 떡하니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니다. 10만원 이익을 낸 빵집이 있다 치자. 이 돈으로 10만원짜리 오븐을 들여놓으면 장부 왼쪽엔 오븐, 오른쪽엔 이익잉여금(사내유보)으로 기입한다. 현금 10만원이 수중에 있는 게 아니다. 투자해도 사내유보는 장부에 남는다. 흑자를 내는 한 사내유보는 계속 증가한다. 장부 오른쪽은 자금의 조달 소스를 표시할 따름이다. 빌린 돈인지, 이익 남겨 모았는지, 주주가 출자했는지 알려주는 공간이다. 이를 어디에 썼는지는 왼쪽에 나온다. 기계를 샀거나, 공장을 세웠거나, 아니면 신규투자나 인수합병을 위해 현금으로 쥐고 있거나….

이를 거두절미하고 경기부양에 동원하려는 시도는 전에도 있었다. 사내유보에 징벌적 세금을 매겨 투자로 유도하려는 기업소득환류세가 그렇다. 2015년 한시적(3년)으로 시행됐는데, 최근 연구에선 임금·투자·배당에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더 거칠게는 사내유보를 임금인상에 쓰자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사내유보는 이미 임금 지급을 거친 금액이다. 임금이 사내유보 감소로 이어지는 경로는 하나뿐이다. 적자가 날 때까지 올리는 것이다. 누가 이런 방만경영을 하겠나.

중앙시평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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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있다.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의 사내유보는 지난 3월 말 426조엔(4310조원)이다. 사상 최대치다. 발표 때마다 증가세다. 사내유보를 투자나 임금인상에 쓰자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래도 우리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 떠들다가 잠잠해진 상태다.

사내유보는 정부가 관리할 거시지표가 아니다. 뭉뚱그려 얼마이니 이걸 풀면 얼마의 효과가 나온다고 할 수는 없다. 기업마다 사정이 다르다. 위기대응에 쓸 수도, 투자에 쓸 수도, 배당에 쓸 수도 있다. 그걸 잘못 건드려 기업가치가 훼손되면 정부가 책임지겠나. 주가가 하락하면 거기에 투자한 국민연금도 마이너스다. 국민의 노후도 불안해진다. 모든 게 줄줄이 엮인 일련탁생(一蓮托生)이다.

물론 기업의 현금성 자산이 계속 증가하는 데엔 문제의식을 지닐 수 있다. 금융위기 때 자금난을 겪어본 기업들은 위기에 대비해 현금을 쥐고 있으려 한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일본 기업들도 2008년 이후 사내유보와 현금성 자산이 급격히 불었다. 개별 기업으로선 합리적이지만, 모두 그러면 문제가 생긴다. 합성의 오류다. 이를 투자에 써야 한다는 지적은 여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기업의 투자로 경기를 활성화시키자는 건 순서가 잘못됐다. 경기가 살아날 전망이 보여야 투자가 느는 법이다. 세계적으로 사내유보는 증가 추세인데, 다른 나라에선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 어떻게 지금의 불황을 사내유보 탓으로 돌리겠나.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얄팍한 심사일 뿐이다.

투자를 꼭 사내유보로 하라는 법도 없다. 은행 돈을 빌리거나 주식·채권을 발행할 수도 있다. 기업이 가장 유리한 방법을 고르면 된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기업의 이익률을 어떻게 높이느냐다. 기업이 만드는 부가가치를 더 늘려야, 즉 생산성을 더 높여야 임금과 일자리도 많아진다. 여당은 이에 대한 고민보다 손쉽게 기업 돈 건드리려는 것 아닌가.

애초에 사내유보에 대한 오해는 용어 탓이 크다. 잉여·유보라 하니 아무나 손대도 되는 ‘만인공유자본’쯤으로 보인다. 한때 학자들이 ‘세후 재투자자본’이라는 대체어를 검토했다고 한다. 이것도 어렵다. 이왕 바꾸려면 단순해야 한다. 위기 대응을 강조해 ‘에어백 자본’이나 ‘안전벨트 자본’, 성장의 원천이란 뜻으로 ‘척추 자본’은 어떤가. 임자 있는 돈임을 부각하려면 ‘당사자 외 촉수금지 자본’도 그럴듯하다. 학자들에겐 무식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다. 더 무식한 무리들이 그악스럽게 달려들 판이니.

남윤호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