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조강수 논설위원이 간다

엘리트 법조인들의 험지 트레킹 … 산중서 법률논쟁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5060 로펌 변호사들의 히말라야 원정기 

로펌 변호사들이 계곡과 계곡 사이를 벗어나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민가들이 보인다. [조강수 기자]

로펌 변호사들이 계곡과 계곡 사이를 벗어나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민가들이 보인다. [조강수 기자]

법의 냉혹함과 돈의 욕망. ‘로펌 변호사’에 덧씌워진 이미지다. 실제론 돈과 명예 양면에서 남부럽지 않은 직업군이다.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2012년부터 7년째 여름 휴가 때마다 세계의 오지(奧地)를 찾아다닌다는 얘길 듣고 적잖이 놀란 이유다. 안락한 휴양지를 놔두고 왜? 삶의 허기를 채워줄 뭔가가 절실했나?

대륙아주 변호사들, 7년째 오지 여행 #올해 인도 쪽 히말라야 라다크 코스 #아침, 저녁 만나면 “약 했어?” 물어 #고산증 예방약 복용 확인이 인사 #비움의 여정서 통합·배려의 정 체득 #친정인 법원과 검찰 상황 걱정도

오지에 중독된 5060 변호사들의 7번째 고행길을 따라나섰다. 올해는 히말라야 마카밸리-라다크 코스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법조계의 엘리트들은 유독 험준하고 높은 산을 많이 찾는다. 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도 히말라야를 세 번이나 가지 않았던가.

지난 1일 오후 인도 쪽 히말라야. 라다크 지역의 끝없는 계곡을 따라 법무법인 대륙아주 소속 변호사 등 10명(1명은 경찰 출신 고문)이 걷고 있다. 실전 트레킹 5일째다. 가끔 짐 실은 말과 노새가 방울소리 딸랑거리며 오갈 뿐 사방이 적막하다. 마지막 봉우리(콩마루 라, 해발 고도 5150m)를 향해 한발 한숨 내디딜 때마다 산소 부족으로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서너 발짝 가면 다시 목이 탔다. 배낭 무게는 고통을 배가했다. 가까운 듯 먼 설산(캉야체, 6400m)과 이름 모를 풀꽃은 무심히 지켜보며 그 뒤를 따라왔다.

지난달 28일부터 매일 9.2㎞씩, 하루에 5~10시간 걸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 인사는 약속이나 한 듯 “약 했어?”였다. 고산병 예방약인 다이아막스를 복용했는지 묻는 건데 마치 마약 복용 여부를 묻는 듯 들렸다. 다이아막스를 먹어도 고도가 높아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온몸이 스스로 아픈 곳을 드러낸다. 안압, 치질, 배탈, 설사, 잇몸병, 역류성 식도염... “인체의 모든 취약점을 드러낸 뒤 밤새 끌어안고 이겨내는 ‘인체 재생 프로그램’이 오지 여행이다.” 최연장자인 김진한(63) 전 대표의 말이다.

밤마다 보름달과 별은 실컷 밝았다. 황량한 황토색 절벽 사이에 언뜻언뜻 보이는 초록 나무, 청보리, 감자꽃은 여기서 살라며 손짓한다. 일행 9명은 로펌의 중추인 파트너급 이상이다. 히말라야에서도 검찰 출신과 법원 출신 변호사의 서로 다른 스타일은 은연 중 드러났다. 검찰 출신이거나 군 법무관 출신은 경쟁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했다. 반면 판사 출신들은 신중하게 호흡조절에 전념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검사 출신들은 재직 시 밤샘 조사를 많이 해서 체력이 튼튼한 것 같다” “판사 출신들은 오버하지 않는 스타일이 몸에 밴 것 같다”….

그 높고 깊은 산속에서 자주 법률 논쟁이 벌어졌다. 한번은 검사 출신 최운식 대표 변호사가 “요새 밀수범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추세더라”고 운을 뗐다. 이를 받아 판사 출신 김용관 변호사가 “대략 징역 3년 정도로 선고 형량이 맞춰지는 것 같다”고 맞장구친다. 그러자 판사 출신 이승택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에 배운 ‘황금교(황금의 다리) 이론’을 기억 속에서 소환한다. 범죄인을 잘 교화시켜 황금의 다리를 함께 건너도록 하는 게 교도행정의 목표라는 설명과 함께다. 이 변호사는 “최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항만사 직원의 금괴 밀수 사건 2심을 맡아 집행유예를 받았다”며 “문제는 밀수한 금괴 가격의 2~5배인 80억원의 벌금형을 병과받아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법이 이렇게 가혹해서야 황금의 다리를 어떻게 건너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6400m 설산 캉야체의 모습. [조강수 기자]

6400m 설산 캉야체의 모습. [조강수 기자]

변호사들은 히말라야의 퍽퍽한 황톳길을 걸으며 친정인 법원과 검찰이 처한 난관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최운식 변호사는 친정인 검찰의 적폐 수사 등에 대해 “지금의 필요에 의한 것이지 정의는 아니다”라며 “전 정권이 쌓은 업과 이 정권간의 연으로 (수사 필요가) 생겼다는 점에서 ‘시절 인연’에 따른 것이지만 정권도, 필요도 때가 되면 바뀐다”고 지적했다.

잠시 후 그는 현실로 돌아와 로펌의 미래 먹거리를 걱정했다.“이제는 단순 자문과 송무 위주의 협업 형태에서 벗어나 기업의 신사업 아이템을 찾고 인허가까지 받아 상생하는 길을 찾아 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진주지원장을 지낸 이승택 변호사는 “소위 엘리트 판사들이 그동안 법원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행동했다”며 “어찌 보면 국정농단 사건의 최순실을 사법농단 사건의 임종헌(전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바꾸면 똑같은 구조 아닌가”라고 질타했다.

군 검찰 내 최고위 자리인 국방부 법무관리관(민간인 소장급) 출신 조동양 변호사는 기무사가 만든 계엄 대비 문건 수사와 관련해 “그런 문건을 작성한 의도가 뭔지를 밝혀내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로펌의 변호사들이 팀을 짜서 매년 오지를 찾는 건 흔치 않다. 하지만 저명 법조인이나 정치인 중에서 유독 해외의 험준한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경우 2011년 2월 대법관에서 퇴임한 뒤 네팔의 히말라야로 떠났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복용한 고산병 예방약 다이아막스. [조강수 기자]

매일 아침, 저녁으로 복용한 고산병 예방약 다이아막스. [조강수 기자]

평소 법원산악회장을 지낼 정도로 ‘등산 애호가’인 그는 대형 법무법인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백년설이 뒤덮인 안나푸르나로 향했다. 그해 6월엔 다시 미국 로키산맥으로 떠났다. 한 달 후 청와대로부터 차기 대법원장 인사 검증을 위한 ‘자기검증 설문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돌연 연락을 끊고 세계 3대 트레일로 꼽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계곡의 ‘존 뮤어 트레일’에 달려갔다. 길이가 358㎞에 보급소가 단 한 군데밖에 없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길’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양 전 대법관 측근은 “독실한 크리스천인 양 전 대법관이 마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마음으로 산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산행 도중 청와대의 연락을 받은 양 전 대법관은 8월 17일 밤 귀국, 이튿날 신임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됐다. 하지만 그는 퇴임 1년만에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는 ‘운명’이 됐다.

간첩 고문·조작 사건을 많이 맡았던 조용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도 남미를 여행한 뒤 ‘안데스를 걷다’라는 기행서를 냈다.

검찰 최고위 간부들도 등산을 선호한다. 역대 정부마다 골프 금지령을 내리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함께 갈 수 있는 산을 찾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퇴임 후 히말라야 등 세계의 고산 등정을 자연스레 꿈꾸게 된다는 것이다. 노환균 전 대구고검장, 박용석 전 대검 차장, 오세인 전 광주고검장도 히말라야에서 일주일간 산행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은 국내파다. 그는 “차장검사가 된 후부터 열심히 등산을 다녔다”며 “지금까지 500m 이상 국내 산 153개를 등정했고 같이 간 사람, 산에 대한 감상 등을 모두 기록해 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등산을 하다 보면 각자의 수사 스타일도 드러난다”며 “특수통 검사들은 죽으라고 정상만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렇게 가면 재미가 없고 여러가지 풍광을 즐기면서 가야 제맛을 안다. 찍고 내려오는 건 등산이 아니다”고 귀띔했다.

취미가 등산이라고 밝힌 문재인 대통령도 히말라야  애호가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청와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당시 젊은 시절부터 피웠던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 귀국했다. 그때 못다 한 트레킹을 완주하려고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게 2016년 6월의 ‘랑탕 트레킹’(LangTang Trekking)이다. 여기엔  문 대통령의 측근인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과 탁현민 선임행정관도 동행, 27일간 숙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 랑탕은 카트만두 북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다. 2015년 네팔 대지진으로 가장 극심한 피해를 본 지역이다. 문 대통령은 모두 세 번 히말라야를 찾았다. 탁 행정관은 랑탕 트레킹에 다녀온 후 트윗에 ‘다시는 히말라야 근처도 안 갈 것임. 측근 안 함’이라는 말풍선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이 2016년 문재인 당시 변호사와 네팔 쪽 히말라야 랑탕에 다녀온뒤 트윗한 말풍선 글과 사진.[탁현민 SNS]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이 2016년 문재인 당시 변호사와 네팔 쪽 히말라야 랑탕에 다녀온뒤 트윗한 말풍선 글과 사진.[탁현민 SNS]

신장 위구르(타클라마칸 사막), 무스탕, 매리설산 및 차마고도, 바이칼 호수, 키르기스스탄 천산산맥, 파미르고원-. 이번에 동행한 변호사들이 2012년부터 매년 여름 찾아간 오지들이다.

김진한 전 대표는 “코타기나발루에 같이 간 엄홍길 대장이 EBC(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를 꼭 가보라고 권했다”며 “EBC에 가서 죽을 고생 한 뒤 오지의 묘미를 알고 변호사 팀을 짜서 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매년 개인 사정에 따라 멤버가 자연스레 바뀌며 경영진 및 파트너 변호사 중심으로 10명 안팎이 동행한다. 이해관계와 계산에 민감하고 각자 잘난(?) 변호사들의 양보와 화합, 단결에 동기 부여가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7년간 오지여행에 전부 참석한 조동양 변호사는 ‘파미르에는 황량한 아름다움이 있다-비움을 위한 여정’이라는 제목의 오지여행기를 지난해 펴냈다. 그는 “7번의 오지 트레킹 중 이번 히말라야 원정이 해발고도가 높아서 가장 힘들었다. 작년 파미르고원에 갔을 때는 도로 한복판에서 고장 난 트레일러 때문에 24시간 낯선 민가에 머물러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들 5060 로펌 변호사들이 마지막 봉우리에서 마주한 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여 통합하는 정(情)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강수 논설위원

※ 이 기사 작성에는 김혜원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