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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자존심 하이힐·핸드백과 이별한 중년 친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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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7)

“문득 돌아보면 같은 자리지만 난 아주 먼 길을 떠난 듯했어.”

하이힐과 가죽가방을 던져버린 여인들. [그림 홍미옥(갤럭시 노트5/아트레이지 사용)]

하이힐과 가죽가방을 던져버린 여인들. [그림 홍미옥(갤럭시 노트5/아트레이지 사용)]

결혼 전 한창 멋 부리던 시절에 유행한 인기가요 ‘이별의 그늘’의 노랫말이다. 그 당시 TV 가요프로그램에서 바바리코트에 손을 찌르고 긴 머리를 날리던 가수 윤상의 멋진 모습과 노랫말은 여성 팬을 설레게 했다. 그런데 왜 느닷없는 이별이며 윤상이냐고? 오늘은 예전에 멋쟁이였고 지금은 더 멋진 두 여인의 이야기다.

중년의 우리는 누구나 이별을 숙명처럼 만나고 받아들인다. 그게 크건 작건,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대상이건 간에. 오늘 그 이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하이힐과 가죽가방이다. 날도 덥고 가뜩이나 살기도 팍팍한데 뭔 멋 내기 타령이냐 싶겠지만, 때론 사소한 것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니까. 물론 내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오랜 친구들의 이야기다.

그날도 어김없이 친구들의 만남은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떠들썩하게 시작됐다. 생각해보니 30대 우리 대화 주제는 익숙하지 않은 시댁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어설픈 육아에서 오는 고달픔이었다. 40대에 이르러선 자녀의 입시와 혹은 속 보이는 자랑, 남편에게 쏟아지는 불만, 어느 날 발견되는 눈가의 가는 주름과 흰머리 한 올로 화제가 바뀌었다.

50대의 중년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는 무슨 이야기꽃을 피우는 걸까? 시댁과의 갈등이나 불만은 진즉에 없어진 지 오래고, 자녀와 남편 이야기도 가끔 밖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꿰어찬 건 건강과 노후에 대한 은근한 불안이다. 부쩍 심해진 건망증과 여기저기 아파오는 몸의 신호, 중년의 자녀가 노년의 부모를 돌봐야 하는 일상의 고단함과 불안 등등. 우리도 이젠 백세시대라는 운동장에 한 발 내디디고 서 있는 셈이다.

납작 운동화에 헝겊 가방 메고 나타난 친구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패션이 달라진 건 불과 1~2년 전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도도한 하이힐을 즐겨 신던 한 친구는 어느 날 세상 편한 납작한 운동화를 신고 나타났다. 유난히 가느다랗고 높던 굽을 씩씩하게 신고 다니던 친구, 앙증맞은 보석까지 박혀 있어 빛나고 탐났던 그녀의 하이힐은 어디에다 두고?

이유인즉슨, 언제부턴가 가끔 별것 아닌 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발목을 접질리기도 한단다. 설상가상으로 ‘다친 발목은 또 다친다’는 진리를 어김없이 경험하는가 하면 나이는 못 속인다고 회복도 여의치 않다는 거다. 아니, 이렇게 공감이 갈 수가 있나. 나머지 친구들은 박수까지 쳐가며 “맞다! 맞아!”를 연발한다. ‘그래, 너의 납작한 운동화는 그런 이유로 네게 왔구나.’ 그렇다면 평소와는 다르게 한 친구의 어깨에 손때가 고급스럽던 가죽가방 대신 얇은 천 가방이 가볍게 올려져 있는 건 무슨 연유인지 궁금하다.

여자의 자존심은 구두와 핸드백이라는 속물 같은 말은 제쳐놓고라도 학부모 모임이나 친구들 모임에 갈려면 가장 고민을 하는 아이템 중 하나가 핸드백일 터. 하물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도 없고 부딪힌 적도 없던 친구는 어깨가 말 안 듣는 사춘기 자녀처럼 느닷없이 속을 썩이기 시작했단다. 이름만 들어도 얄미운 오십견이 그 주인공인데 우리 한번 잘 지내보자며 찾아온 것이다.

에코백은 천(헝겊)으로 만들어진 가방이다. 가볍고 실용적이며 친환경 제품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중앙포토]

에코백은 천(헝겊)으로 만들어진 가방이다. 가볍고 실용적이며 친환경 제품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중앙포토]

하는 수 없이 다소 무겁지만 멋스럽던 가죽가방은 장롱 속에 모셔둘 수밖에 없었단다. 대신 에코백이라는 개념 있는 이름을 위안 삼아 가볍고 실용적인 헝겊 가방을 메고 다니게 되었다고. 여기서 또 들리는 우렁찬 공감의 소리! “이젠 멋이고 뭐고 편한 게 최고야. 이러다가 우리 다음부턴 쭉쭉 늘어나는 등산복에 운동화, 에코백을 빙자한 장바구니를 들고나오는 거 아냐. 호호홋.” 한바탕 주위가 떠내려가게 웃어 재끼다가 이내 시무룩해진다.

자녀들도 하나둘 품을 떠나가고, 이제 보니 사소하게 여겨왔지만 늘 함께했던 물건까지도 알게 모르게 우리 곁을 떠나는 거 아닌가. 커다란 일은 나름 준비도 하고 예상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작은 일은 신경조차 쓰지 않다가 어느 날에야 문득 깨닫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날 우린 과연 윤상의 노랫말처럼 인생은 항상 ‘이별의 그늘’이라는 정류장에서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다소 철학적이고도 감성 넘치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다.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가죽가방 대신 에코백을 들어도 중년의 시간은 아름답다. [중앙포토]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가죽가방 대신 에코백을 들어도 중년의 시간은 아름답다. [중앙포토]

한층 더 가벼워진 중년의 아름다운 시간 

‘만날 수 없었지 한번 어긋난 후, 나의 기억에서만 사라져간 먼 그대.’ 20대에 듣는 유행가는 모조리 내 사연 같다고 했던가. 50대에 듣는 유행가 가사도 딱 내 이야기지 싶다. 한번 어긋난 후 먼 그대가 되어버린, 물론 재밌게도 그 대상은 연인이 아닌 한낱 구두나 핸드백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지옥 중의 최고봉이라는 입시지옥도 같이 경험하고 온갖 대란(?)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아줌마들 아닌가 말이다. 그까짓 하이힐과 가죽가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자, 이제 가볍고 편한 신발과 가방을 둘러매고 중년 이후의 다가올 멋진 세상에 홀가분하게 뛰어들어갈 일만 남았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중년의 기백은 보나 마나 아름다울 테니까. 그림을 그리다 보니 운동화에 에코백을 들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부쩍 생기 있고 젊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만큼은 20대의 뒤태로 그려 줄 거다. 비록 한 올 두올 흰머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사실 나도 진즉부터 멋진 민소매 티셔츠와 이별을 했다. 물론 굵은 팔뚝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어깨통증 치료 후 남은 무지막지한 부황 자국 때문이다. 아, 그 검푸르죽죽 삶은 문어 같은 색깔이라니…. 까짓거 역대 최고급 더위라는 이 여름에 그냥 와일드한 동그라미 타투라고 우기고 입어버릴까 생각 중이다.

[오늘의 드로잉 팁]

ArtRage앱 레이어(layer)기능. [사진 홍미옥]

ArtRage앱 레이어(layer)기능. [사진 홍미옥]

반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물감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마티에르(matiere: 울퉁불퉁하고 풍부한 질감의 표현을 일컫는 미술용어)를 폰에서도 표현할 수 있을까? 정답은 ‘Yes’다! 어마어마한 유화 물감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

지난 시간에 설명했듯이 유화 표현에 적합한 아트레이지 앱을 실행한 후, 왼편의 물감 모양 브러시를 선택한다. 마치 실제 물감을 짜듯이 맘껏 화면에 올려둔다.

ArtRage앱 레이어(layer)기능. [사진 홍미옥]

ArtRage앱 레이어(layer)기능. [사진 홍미옥]

다음에 오른편의 나이프를 이용해 문지르면 보는 것과 같은 양감이 느껴지는 표현이 가능하다. 반 고흐는 빵값을 아껴서 물감을 샀다지만 오늘날 스마트폰 그림에선 그럴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다.

오른편 화면 위에 다시 물감을 짜듯이 올려서 나이프로 살살 문질러주면 아를(Arles)의 태양 아래 빛나던 노란 해바라기의 두툼한 그 느낌이 작은 화면에서 빛나는 걸 발견할 것이다.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keepan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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