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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쟁과 평화

‘연저지인’ 고사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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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기원전 4~5세기 중국의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오기(吳起)는 병사 한 명이 다리에 심한 종기가 생겨 고름을 흘리자 서슴없이 입으로 빨았다. 그 소식을 들은 병사 어머니가 대성통곡했다. 이웃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오기 장군이 애 아버지 종기도 빨았는데, 그이는 전장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아 죽었다”며 “이번엔 저 애가 언제 어디서 전사할지 모른다”고 답했다. ‘종기를 빠는 인자함’이란 뜻의 연저지인(吮疽之仁) 고사다. 오기는 평소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저지인은 ‘계산에 따른 선행’을 일컫게 됐다.

2500년도 넘은 옛날 얘기를 꺼낸 이유는 지난 18일 1주년을 맞은 K9 자주포 폭발 사고 때문이다. 지난해 8월 18일 강원도 철원 사격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3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했다. 이때 화상을 입어 아직도 치료를 받는 이찬호(25) 예비역 병장과 통화했다. 그는 “요즘처럼 날씨가 더워지면 지난해 여름 사고 기억이 더 생생해진다. 밤잠을 거의 못 잔다”며 입을 뗐다.

향후 치료를 받을지 불분명해 제대를 미뤘던 이씨의 사연이 알려진 뒤 30만2635명이 그를 돕자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했다. 그는 “지난달 11일 나와 관련한 청원에 답하는 자리에서 청와대 비서관이란 사람이 농담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국가가 알아서 다 해 줄 것이란 믿음을 접었다”며 “몸을 추스른 뒤 더 크게 내 목소리를 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언론과 여론의 압박에 주무 부처인 국가보훈처가 “전례가 없다”며 미온적이던 입장을 바꿔 국가유공자 등록 절차를 신속히 진행했다.

반면 고 유호철 대위는 보훈의 민낯을 보여준다. 유 대위는 석면 천장을 뜯고 통신선을 까는 작업을 하다 2014년 폐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상이연금과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다. 그러나 정부는 폐암 발병과 작업 환경의 관련성을 입증할 수 없다며 기각했다. 유 대위는 아픈 몸으로 국방부와 법정 투쟁 끝에 이겼다. 그러다 국가유공자 등록을 놓고 보훈처와 소송을 준비하던 지난 3월 숨졌다. 이씨와 유 대위를 보면서 누가 국가를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려 할까. 질병과 부상으로 여생을 보내느니 몸을 사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탓할 수 있을까.

그런 보훈처가 요즘 ‘적폐청산’과 ‘건국 100주년 사업’에 바쁘다. 청와대 코드를 맞추는 일들이다. 속이 뻔히 보여도 연저지인의 오기처럼 보훈처가 본업에 충실하길 바란다. 어설픈 보훈은 국방력을 갉아먹는 종양이다.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