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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백년대계, 탈원전보다 시급한 탈국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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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7년 전인데 엊그제 일들처럼 생생하다. 우선 2011년 3월 이웃 일본에서 터진 후쿠시마 원전 참사. 당시 이명박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원전 확대 정책에 찬물을 끼얹은 계기가 됐다. 하지만 불과 반년 뒤 9월의 우리나라 대규모 순환 정전(停電) 사태로,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 조달기반으로서 원전의 입지가 되살아났다. 전력(電力) 이슈가 모처럼 온 국민적 관심을 사로잡은 한 해 두 사건이었다.

한국전력 적자 근본 원인, 탈원전보다 국가주의 #역대 정권 적폐인 관치 전기요금은 왜 안 버리나

이런 반전(反轉)은 문재인 정부 들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중첩된다. 지난해 11월 진도 5.4의 경북 포항 지진이 원전 안전성에 대한 탈원전론자들의 우려 목소리를 키웠지만 지진 못지않은 올여름 폭염 재난과 이로 인한 냉방 수요 급증, 전력수급 우려가 원전의 존재감을 부각했다. 여기에 한국전력의 어닝쇼크 소식(올 상반기 8000억 원대 영업적자)은 ‘탈원전 과속 책임론’ 여론 공방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논란은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 진보라는 현 정권도 과거 보수 정권처럼 전기요금을 꽉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원전의 속도 위반 여부를 떠나, 원전 가동이 줄어서 이를 메워야 할 석탄·석유·가스 같은 대체 발전연료의 국제시세가 올랐다면 이를 전기요금에 반영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부가 요금을 정치적 고려로 묶어두다 보니 적자가 불어날 수밖에.

우리나라의 기형적 에너지 세제와 요금 체계에서 전기는 놀림감이 된 지 오래다. “수돗물보다 싼 생수” “쌀보다 싼 햇반” “옷감보다 싼 옷” 등등…. 4월 부임해 비상경영을 선포한 김종갑 한전 사장도 SNS를 통해 전기 원료와 전기의 가격역전 현상을 가리켜 “두부가 콩보다 싸게 됐다”고 푸념했다.

여름 냉방 수요 폭증은 기본적으로 살인적인 무더위 탓이지만, 전기료가 다른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싼 때문이기도 하다.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해 요금 부담을 줄여주라”는 문 대통령의 최근 지시는 포퓰리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나쁜 정치”(김문수 전 서울시장 후보)라는 야권의 비판도 나왔다. 전기에 제값을 매겨 경제원리로 풀 문제를 ‘대통령 지시’ 한 말씀에 따라 정치적으로 푸는 행태도 이전 정권과 판박이다.

공공 기간산업인 전력에 시장경제의 잣대만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수십 년간 요금을 무리하게 억누른 데 따른 낭비 풍조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탈원전·탈석탄의 ‘에너지 전환’을 거세게 밀어붙이겠다는 현 정부가 “5년 집권 기간 전기료를 인상하지 않겠다”(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는 입장을 남발하는 건 무책임하다.

어디 가격정책뿐인가. 보수든 진보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기 에너지 기본계획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려내는 바람에 국민적 공감과 신뢰를 받기는커녕 반대와 갈등을 증폭시켜 왔다. 현 정부가 지난해 말 내놓은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은 어떤가. 2030년까지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로 급격히 높이겠다면서 전력요금 인상도, 전력수급 문제도 없다고 장담해 많은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에너지 계획과 전기요금을 멋대로 정하는 정부, 발전 원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소비자 선택주권조차 없는 전력요금 체제, 이를 묵인하고 영합해온 공기업 독점 체제를 방치하면서 이상적인 ‘에너지 믹스’를 달성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탈원전 페달을 밟기 전에 더 급한 것이 탈국가 노선이다. 관치요금 적폐를 끊고 전기를 민간과 시장에 돌려줘야 한다. ‘에너지 백년대계’라는 거창함에 값하려면 숱한 전문가와 시민단체가 제안해 온 독립적 위원회나 사회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집집이 태양광 패널을 지붕에 깔아 시민들이 각자 전기를 만들어 쓰는 세상, 바로 ‘에너지 민주주의’의 이념 아닌가.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