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선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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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세상 참 이상한 일 많다. 아이들을 돌보는 게 직업인 보육교사가 아이에게 욕설을 퍼붓고 때린다. 환자를 돌보는 게 일인 간병인이 환자를 학대하고 구타한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더 많은 보육교사나 간병인들은 맡은 바 그대로 아이와 환자를 간수하느라 자신을 챙길 겨를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가 그럴 터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보육교사나 간병인들도 은근히 많은 거다. 그래서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꼴뚜기 한 마리가 어물전을 말아먹는 것이다.

국민을 시궁창에 처박는 미꾸라지 뒤에는 권력이 있어 #반면교사 없으면 같은 길 걷게 된다고 과거는 말한다

아이들이나 환자, 노인들을 돌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꼭 해봐야 아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인내를 해야 하는 거다. 끓어오르기가 넘쳐 뚜껑이 열릴 정도라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게 맞는 거다. 아이들이나 환자, 노인들을 성질대로 두들겨 패는 건 반칙인 거다. 곧 범죄가 된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적성에 맞는 다른 일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일자리 구하기 어렵더라도, 범죄자가 되기 전에 스트레스를 받아 스스로 명을 단축할 텐데 말이다.

이 정도는 약과다. 잘못된 선택에 의한 피해자가 단수다. 더 말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원장 배만 채우는 어린이집 급식’ ‘OO장애인단체 보조금횡령’ ‘고교 시험지 유출’ 같은 사건들이 심심찮게, 그리고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어린이집과 장애인단체 같은 사회시설이나 선생님들을 욕되게 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여기 역시 미꾸라지가 있을 뿐이다. 미꾸라지의 사고는 규모가 제법 크다. 피해자가 다수다. 배곯는 아이들과 두 번 상처 입는 장애인들, 입시에서 영문 모를 불이익을 받는 학생들 외에도 세금을 낸 국민들까지 열을 받는다. 어린이집이나 장애인단체, 학교는 신념이나 소명의식 같은 게 없으면 견디기 어려운 곳 아닌가.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이런 미꾸라지들이 왜 거기서 물을 흐리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약과다. 여전히 피해자가 국지적이다. 전 국민을 시궁창에 처넣는 대왕 미꾸라지들이 있다. 우선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그가 삼키려다 실패했다는 비망록 메모가 사실이라면, 그의 인생은 출세를 위한 인사청탁으로 도배돼있다. 금융위원장, 산업은행 총재, 국회의원이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라고 믿었다. 뜻대로 안 되면 ‘파렴치한 인간들’ ‘침 뱉고 싶다’고 욕을 했다. 그리고 결국은 현금 19억5000만원과 양복 1230만 원어치를 지불한 대가로 우리금융지주 회장 자리를 얻어낸다. 또다시 돈을 써 연임에도 성공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다음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다. 대법원장은 국가를 지탱하는 입법과 사법, 행정이라는 세 축 중 하나인 막중한 자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핵심 과제였던 ‘상고법원’을 얻어내기 위해 공정한 재판을 위한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사법가치를 짓밟아버렸다. 재판을 정부와의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 대일관계를 고려한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소송 판결을 미룬 의혹을 받는다. 실제 그 소송은 5년간 미뤄지다 지난달에야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정치적인 세력 등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뤄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는 그의 퇴임사는 그야말로 고해성사였던 것이다.

또 이주민 서울경찰청장도 있다. 그는 수사력을 총동원해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경찰의 수장으로서 오히려 진실을 은폐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사건 초기부터 스스로 나서 “김경수 의원은 드루킹에 의례적인 감사 인사만 전했다”고 비호하고, 수사하는 시늉만내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증거는 하나둘 사라지고, 용써 봐야 도리 없는 특검수사 역시 맥없이 끝날 상황에 처했다.

이들 대왕 미꾸라지 뒤에는 여지없이 권력이 도사린다. 이팔성 뒤에 이승주를 거쳐 그의 장인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었고, 양승태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이주민 역시 김경수와의 고리가 문재인 대통령한테까지 걸려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미꾸라지가 흐려놓은 물은 다시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정권의 두 사례가 말해준다. 그들은 이 땅의 보수정치를 아예 말아먹었다. 그 덕에 얻은 정권이지만 같은 이유로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뭘 해야 할지 명백하다는 말이다.

“남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하고, 스스로를 아는 자는 현명하다 하며, 스스로를 이기는 자는 강하다 한다(知人者智 自知者明 自勝者强).” 『노자(老子)』에 나오는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