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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붓다는 출생 직후 어떻게 일곱 걸음 걸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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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출생한 신생아가 일곱 걸음을 걸었다.
태어나자마자 동ㆍ서ㆍ남ㆍ북 사방을 둘러본 뒤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다.

인도 룸비니 동산의 마야데비 사원 안에 있는 붓다의 출생 조각상. 오래 돼서 표면이 많이 닳았다. 룸비니=백성호 기자

인도 룸비니 동산의 마야데비 사원 안에 있는 붓다의 출생 조각상. 오래 돼서 표면이 많이 닳았다. 룸비니=백성호 기자

상식적으로 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다.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신생아가 어떻게 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을 수 있을까.
뿐만 아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올라와 발을 받쳤다고 한다.
아기 왕자는 그렇게 일곱 걸음을 걸었다.
훗날 붓다가 되는 아기 왕자 싯다르타다.

일곱 걸음을 걷고서 아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선 이 한 마디를 남겼다.

일곱 걸음을 걷고서 아기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 룸비니=백성호 기자

일곱 걸음을 걷고서 아기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 룸비니=백성호 기자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어찌 보면 독선적인 발언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한문으로 이렇게 옮겼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아니,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은 것도 믿기지 않는데,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더더욱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진다.

“아니, 어떻게 갓난 아기가 걸을 수가 있나. 그것도 일곱 걸음씩이나.”
지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니. 자기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건가.”
“이건 너무나 독선적이다. 독단적이다. 나중에 붓다가 되는 인물이 어쩌면 이렇게 오만한 선언을 할 수가 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판한다.

싯다르타 왕자의 출생 일화를 새긴 조각 작품.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걸음을 걷고 있다. [중앙포토]

싯다르타 왕자의 출생 일화를 새긴 조각 작품.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걸음을 걷고 있다. [중앙포토]

기독교인들의 비판은 더하다.
“결국 불교는 자신이 신이 되려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우주를 통틀어 자신이 가장 잘났다니. ‘겸손’이라곤 눈꼽 만큼도 찾아보기가 어렵네. 그러니 불교는 한 마디로 ‘오만한 종교’가 아닌가.”

기독교인 뿐만 아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문학가 와타나베 쇼코도 자신의 저서 『불타 석가모니』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뜻을 비슷하게 풀이했다.
쇼코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
결국 아기 왕자는 “내가 제일 잘났어!”라고 말한 셈이다.

나는 쇼코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해석이 틀렸다고 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독선적 선언”이라는 말에도 고개 끄덕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붓다만이 최고’‘붓다만이 지존’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게 아니다.

인도 룸비니 동산에 세워져 있는 아기 붓다의 동상. 한 손은 하늘, 한 손을 땅을 가리키고 있다. 백성호 기자

인도 룸비니 동산에 세워져 있는 아기 붓다의 동상. 한 손은 하늘, 한 손을 땅을 가리키고 있다. 백성호 기자

붓다가 태어난 장소인 인도의 룸비니를 찾은 적이 있다.
그 출생 장소에 마야데비 사원이 서있다.
그곳을 찾았을 때 내 안에서 물음이 올라왔다.
“실제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었을까?”
“옹알이만 하는 신생아가 입을 열고 ‘천상천하’를 외쳤을까?”
물론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일화는 그저 지어낸 허구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더 깊은 상징과 울림이 도사리고 있다. 그 상징이 바로 이 일화의 존재 이유다.

 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나머지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왜 하늘 위와 하늘 아래일까.
우주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우주를 관통하는 걸까.
다름 아닌 ‘붓다의 정체성’이다.
그렇게 우주를 관통하는 ‘붓다의 속성’이다.
그래서 ‘유아(唯我)’이다.
그러니 ‘유아(唯我)’의 나(我)는 작은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소아(小我)’가 아니라 ‘대아(大我)’다.
이 우주를 관통하는 오직 하나의 나다.

룸비니 동산을 찾은 세계 각국의 순례객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룸비니 동산을 찾은 세계 각국의 순례객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룸비니 동산에 바람이 불었다.
시원했다. 사원 맞은편의 아름드리 보리수가 마구 흔들렸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숱한 순례객들.
룸비니의 붓다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무엇이 홀로 존귀한가?”
“무엇이 숨 쉬고, 무엇이 노래하고, 무엇이 생각하고 있는가?”

그 물음이 걱정의 나무에 물을 주고,
걱정의 나무를 키우며,
걱정의 나무를 붙들고 사는 우리의 가슴에 표창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번 주에도 '금지된 질문들'을 던져 봅니다.
J팟 팟케스트.
이번 주 주제는 '[금지된 질문들2] 붓다는 출생 직후 어떻게 일곱 걸음 걸었나'입니다. 그외에도 '불교의 깨달음은 거대한 욕망이 아닌가?' '붓다는 무아를 설했는데, 내가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나?' 등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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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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