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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워룸·전투R&D' 독하게 뛴다…현장서 본 반도체 위기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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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운 감도는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4 반도체 생산라인. 웨이퍼를 신속·정확하게 자동으로 운반하는 장치(OHT)가 천장에 보인다. OHT가 달리는 고정레일을 모두 합치면 14㎞에 달한다. [사진 SK하이닉스]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4 반도체 생산라인. 웨이퍼를 신속·정확하게 자동으로 운반하는 장치(OHT)가 천장에 보인다. OHT가 달리는 고정레일을 모두 합치면 14㎞에 달한다. [사진 SK하이닉스]

1년 전 이 자리에 ‘하이닉스 주변엔 6000억원의 초호황 낙수가 흐른다’는 기사(2017년 7월 27일)를 썼다. 초호황을 구가 중인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주변 상권과 지방자치단체가 낙수효과를 누린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회사 사정 탓에 반도체 라인을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지난주 하이닉스가 자랑하는 최신 생산라인 M14를 직접 볼 기회가 생겼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초장기 호황)이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주 ‘반도체 저승사자’ 모건스탠리가 반도체 위기론에 불을 질렀다. 5일 SK하이닉스의 목표주가를 내리며 ‘매도’ 보고서를 냈고, 9일 반도체 업종 투자 전망을 ‘중립’에서 ‘주의’로 낮췄다. 삼성전자·하이닉스 주가는 직격탄을 맞고 고꾸라졌다. 반도체 위기론의 실체를 현장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투자 늘어나 캠퍼스 곳곳이 공사판 #‘죽기 살기로’ ‘끝장’ 살벌한 구호도 #“낸드 3~4년, D램은 5년 중국 앞서” # 대놓고 말 안하지만 자신감 내비쳐 #중국 추격 속도는 예상보다 빨라 #학자들 “기술격차만 볼 게 아니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를 찾은 10일도 이 회사 주가는 3% 넘게 하락했다. 반도체가 끌고 가는 나라인데, 반도체가 흔들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안고 ‘행복문’으로 불리는 정문을 통과했다. 캠퍼스 곳곳은 공사 중이었다. 2002년 중국 BOE에 매각된 하이디스 건물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하이닉스의 품으로 돌아와 후공정 등을 처리하는 멀티팹으로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최근 1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새 공장(M16) 부지인 축구장과 통근버스 주차장 주변은 연말 공사 시작을 앞두고 준비 작업이 한창이다. 첨단 반도체 공장이 공사판같이 어수선한 건 다소 뜻밖이었지만 그 자체가 잘나가는 반도체 호황의 방증이기도 했다.

지난 10일 찾아간 경기도 이천시 하이닉스 이천캠퍼스는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뒷편 오른쪽 건물이 최첨단 반도체 생산라인 M!4. 축구장과 그 옆의 주차장에 15조원을 투자하는 새 생산시설 M16이 들어선다. 축구장 너머 건물은 멀티팹으로 재단장되고 있는 옛 하이디스 건물. [사진 SK하이닉스]

지난 10일 찾아간 경기도 이천시 하이닉스 이천캠퍼스는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뒷편 오른쪽 건물이 최첨단 반도체 생산라인 M!4. 축구장과 그 옆의 주차장에 15조원을 투자하는 새 생산시설 M16이 들어선다. 축구장 너머 건물은 멀티팹으로 재단장되고 있는 옛 하이디스 건물. [사진 SK하이닉스]

2015년 완공된 M14 3층의 D램 생산라인 입구에 대자보 같은 포스터가 보였다. ‘반도체 전쟁 승리를 위한 패기의 실천 수칙’이라는 부제와 함께 ‘SK하이닉스인(人)의 독한 행동’이라고 큰 제목이 달려 있었다. ‘독한 행동’ 네 글자는 더 크게, 빨간 글씨로 썼다. 내용은 살벌했다. “1. 목표는 반드시 ‘경쟁자를 이기는 수준’이어야 한다. 2. 정해진 목표는 ‘죽기 살기로 달성’해낸다. …5. 안 되는 것은 없다. ‘되게 하는 방법’을 찾아서 ‘끝장’낸다.…” 이 회사 이윤경 책임(캠퍼스 디자인)은 “연구실은 ‘워룸’, 연구개발(R&D)은 ‘전투 R&D’로 부르며 독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생산라인은 볼 만했다. 축구장 4개 크기의 공장 천장에 설치된 레일을 타고 웨이퍼(반도체 원료인 실리콘 원판)를 운반하는 650대의 기계(OHT)가 미리 프로그램된 동선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맡은 업무에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의 방진복을 입은 작업자들이 줄 맞춰 가지런히 배치된 1400개 제조장비 사이를 오갔다. 제조장비 한 개 가격은 F15-K 전투기 가격(1000억원)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곳에서 600가지 공정을 거쳐 머리카락의 1만 분의 1에 해당하는 10나노미터(㎚, 10억 분의 1m) 후반대의 미세한 회로 선폭(배선과 배선 사이)을 자랑하는 반도체가 탄생한다. 감이 잘 안 온다고 하자 이윤경 책임은 “지름 30㎝ 케이크에 13조 개의 초를 꽂을 수 있는 기술”이라고 애써 다른 비유를 들었지만 비현실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4 생산라인. [사진 SK하이닉스]

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4 생산라인. [사진 SK하이닉스]

모건스탠리 보고서와 그에 따른 주가 급락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SK하이닉스 박준식 수석(미래전략)은 “큰 그림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하이닉스가 보는 새로운 도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반도체 미세화로 기술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장비와 투자비는 늘어났다. 더 많이, 더 빨리 투자해야 앞서갈 수 있다. 둘째,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심상치 않다. 셋째, 인공지능(AI)·5세대(5G) 통신 등의 확산으로 초고속·저전력·대용량 메모리 수요가 커졌다. 인텔은 이미 뉴메모리(Xpoint)를 개발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해 박 수석은 “낸드(NAND)는 3~4년, D램은 5년 이상 기술 격차가 있다”며 “중국 업체가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긴 힘들 것”이라고 했다. 양산을 시작해도 기술 격차로 수율이 낮을 수밖에 없어 수익을 내기 힘들고, 고객 맞춤형(customized)인 반도체 영업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 기업을 따라오기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한데 하이닉스는 나중에 이런 입장을 좀 더 조심스럽게 수정했다. “기술적 측면만 고려한 분석일 뿐이며,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상당한 의미가 있어 당사는 이를 잠재위협으로 판단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게 공식 입장이었다. ‘부자 몸조심’하는 걸까. 어쨌든 ‘경계는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우린 자신 있다’는 자긍심이 느껴졌다.

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4 생산라인. [사진 SK하이닉스]

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4 생산라인. [사진 SK하이닉스]

증권가 분위기가 궁금해 최근 보고서를 훑어봤다. ‘서버 수요 전혀 문제없다’(NH투자증권), ‘흔들리지 않는다’(DB금융투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누가 죽이랴’(대신증권) 등 제목만 봐도 여전히 낙관론이 우세했다. KB증권은 “D램 산업의 중심축이 PC·모바일의 개인 소비자에서 서버 중심의 기업용으로 옮겨가는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며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과도한 우려보다는 내년 연착륙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분석했다. 중국 D램 기술은 답보 상태지만 낸드는 상대적으로 앞서 있다. 중국 칭화유니그룹 산하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는 지난주 미국에서 32단 3D 낸드플래시 시제품을 선보이고, 내년부터 양산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주력제품인 64~72단의 4세대 낸드플래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놀라운 속도로 추격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증권가 반응은 시큰둥했다. 삼성증권은 ‘중국 반도체: Coming, not threatening’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뒤처진 공정 기술과 원가 수준, 부족한 인력을 고려하면 위협적이지 않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학계 전문가들은 걱정이 많았다. 무엇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한국과의 기술 격차만 보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우리가 죽을 둥 살 둥 반도체에 매달려 성공했던 것처럼 중국도 매우 간절하다”며 “산업 수요뿐만 아니라 미국에 맞서 국방·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중국은 반도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후발주자인 중국의 추격 여건은 과거보다 좋다. 돈이 있고, 연구인력이 넘치며, 기술 좋은 장비업체가 많고, 내수 시장이 충분해서다. 황 교수는 “우리는 제조공정의 디테일을 살려 반걸음씩 앞서가는 게 중요하다”며 “우리는 세계 최고 제품을 만들어 수출해야 하지만 중국은 우리 제품의 70~80% 수준이어도 충분히 자국에서 소비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업체가 양산에 들어가면 내수를 바탕으로 손익분기점을 넘는 건 시간문제라는 얘기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중국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따라온다”며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려면 우선 국가 연구개발(R&D)을 늘리고 정부도 지금처럼 반도체 회사의 투자를 유도하며 반도체 연구인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국내 반도체장비·소재·부품업체, 대학, 정부가 일심동체로 마음을 합해 선순환하는 반도체 생태계를 만드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