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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소방관이 행복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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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어느 나라나 그렇듯 한국에서 소방관은 우러러보는 직업이다. ‘존경하고 신뢰하는 직업’을 조사할 때마다 소방관이 부동의 1위다. 하지만 찬사와 현실은 다르다. 무엇보다 고되기 이를 데 없다.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해 화재진압과 구조·구급 출동이 총 373만7000여 건에 이른다. 한 명이 하루에 두 자릿수 출동하는 날도 있다.

반면 처우는 열악하다. 소방관들이 자조 섞어 ‘목숨값’이라 부르는 위험근무수당은 월 6만원이 고작이다. 원래 5만원이었다가 2008년 처음 인상을 거론한 뒤, 단돈 1만원 올리는 데 8년이 걸렸다. 순직 소식이 들리면 들끓는 처우 개선 여론이 얼마 가지 않아 식곤 했던 탓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소방관들에게 제때 주지 못한 초과근무수당이 1900억원에 이른다는 지적이 나왔다. 소방관 자살도 최근 3년간 33건 일어났다. 상당수는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소방관들이 더 가슴 아파하는 건 화마와 싸우다 암 같은 병마를 얻은 동료다. 가족력도 없고 건강진단에서도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난치병에 걸리곤 한다. 화재 현장에서 유독가스를 많이 마신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이 업무상 얻은 질병(공상)으로 인정해 치료비를 지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불가 판정을 통보받은 뒤에 소송을 통해 인정받는 게 대부분이다. 대법원 판결이 날 때쯤이면 투병하던 소방관은 세상을 뜨는 일이 허다하다. 암에 걸려 공상 인정을 받으려고 법정 싸움을 하던 소방관은 과거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때는 제복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이젠 누구에게도 소방관이 되라고 권하지 않겠다.”

젊은 소방관 두 명이 다시 희생됐다. 표류하던 민간 보트를 찾다가 변을 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페이스북에서 “두 분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다. 국민 모두 한마음일 터다. 이참에 소방관들이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면 어떨까. 예컨대 미국·캐나다·호주와 같은 ‘공상 추정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건강하던 소방관이 5년 이상 현장에 출동하고 나서 암 등에 걸리면 공상으로 인정하는 법이다. 공상이 아니라고 의심되면 국가가 증명해야 한다. 업무 때문에 얻은 질병임을 입증하기 위해 암에 걸린 소방관이 직접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는 한국과는 정반대다.

이렇게만 해도 소방관들이 조금은 어깨를 펼 것이다. 모든 소방관이 자랑스럽게 “소방관이 되라”고 권하는 사회는 언제쯤 올 것인가.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