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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대통령의 설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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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는 내가 처음 만난 ‘미드’(미국 드라마)였다.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스토리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미 국회의사당을 통째로 날려버린 폭발물 테러가 일어나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 각료들이 모두 사망한다. 지정생존자는 이런 비상 상황에 대비해 별도의 장소에서 대기한다. 유사시 승계 순위에 따라 지정생존자가 대통령직을 떠맡는다. 정부 기능을 유지하는 안전장치다. 좀 황당하긴 해도 미 대통령 승계법에 정해져 있다.

드라마 속 지정생존자는 내각에서 별 볼일 없던 도시개발장관 톰 커크먼이다. 그는 졸지에 대통령직에 올라 혼돈의 정부를 이끌어 나간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커크먼의 설득이다. 커크먼은 대통령이라고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사사건건 정치적 반대에 부닥친다. 한 정치 쟁점은 표결까지 가게 됐는데 한 표 차이로 법안을 통과시킨다. 국익만을 생각하며 진정성 있게 반대 진영을 설득해 마음을 얻은 결과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경제 곳곳에 내걸린 ‘붉은 깃발’을 걷어내겠다고 선언하자 노동·시민단체가 기다렸다는 듯 즉각 반발하고 있다. “규제완화는 친(親)재벌 정책”이라는 것이다. 영국은 1865년 마차업자 보호를 위해 자동차를 운행할 때 기수에게 붉은 깃발을 들게 하고 속도를 2마일(3.2㎞)로 제한했다. 자동차산업의 주도권이 독일로 넘어가게 된 배경이다.

한국의 ‘은산분리법’은 판박이다. 재벌의 사금고화 우려가 있다면서 기업의 은행 의결권 보유 한도를 4%로 제한하고 있다. 이 법이 성역처럼 되면서 한국의 4차 산업혁명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전자상거래·차량공유·블록체인·빅데이터·인공지능 같은 신산업은 중국의 성공 사례를 보더라도 모두 핀테크를 떼놓고는 한 발도 못 나간다. 중국의 IT 군단 ‘BAT’(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의 핵심 병기는 사실 이들이 보유한 인터넷전문은행이다.

문 대통령이 붉은 깃발을 뽑겠다는 것은 이명박의 전봇대 뽑기, 박근혜의 손톱 밑 가시 제거와 같은 맥락에 있다. 앞의 두 대통령도 규제 혁파에 나섰지만 성공의 고지를 밟지 못했다. 노동·시민단체와 지금 여당의 반대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정생존자를 보면서 “아! 이명박도, 박근혜도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뇌리를 스쳤다. 문 대통령 역시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커크먼’이 돼야 한다. 야당은 협조적이다. 내부 진영의 반대자들만 설득하면 된다. 훨씬 여건이 좋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