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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물알못’ ‘수알못’ 키우는 수능개편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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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만 교육팀 기자

윤석만 교육팀 기자

“학기 초반엔 고등학교 교실인지 대학 강의실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이과 교수 A씨의 말이다. 신입생들에게 기초물리학을 가르치는 그는 “고교에서 미리 배웠어야 할 내용조차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이공계 학생들의 ‘물알못(물리를 알지 못하는)’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고 말했다.

‘물알못’ 현상은 일부 대학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대는 내년부터 공대 신입생을 위한 ‘물리 기초반’을 운영한다. 고교에서 물리Ⅱ를 배우지 않아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을 위해서다. 앞서 서울대는 2012년부터 이공계 신입생들이 듣는 ‘미적분학의 첫걸음’ 수업도 개설했다. 이 역시 ‘수알못(수학을 알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됐다.

이와 같은 ‘물알못·수알못’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가 이달 중 결정하는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 과목에서 수학·과학 범위를 대폭 축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21학년도 수능부터 기하(수학)를 빼기로 한 것도 모자라 이번엔 과학Ⅱ 4과목을 모두 제외할 전망이다. 기하는 도형과 좌표 등 공간을 다루는 학문으로 농경, 건축 등 실용기술에 많이 쓰인다.

7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교육부의 수능 출제과목 개편안에 반대하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 [연합뉴스]

7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교육부의 수능 출제과목 개편안에 반대하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 [연합뉴스]

교육부가 기하와 과학Ⅱ를 수능에서 뺀 것은 문·이과 통합의 취지를 살리고 수험생들의 학습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문·이과생 모두 사회·과학에 응시토록 하는 대신 기존의 심화과목은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현재 수능에서 문과생은 사회만, 이과생은 과학만 시험을 보고 있어 융복합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부의 취지는 좋다. 문제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문·이과 통합이 아니라 ‘문과로의 통합’이란 지적이 나온다는 점이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 등 13개 단체는 지난달 “과학과 수학 교육을 축소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라며 “기하와 과학Ⅱ를 모두 수능 과목에 포함시켜 달라”고 주장했다.

히지만 교육부는 원안대로 확정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일 국가교육회의가 수능 상대평가 유지 등 대입개편 권고안을 발표했는데 출제과목에서 수학·과학 축소는 애초부터 공론화 대상도 아니었다. A교수는 “1년 동안 공론화한다면서 제자리걸음을 해놓고 정작 의견수렴이 필요한 내용은 독단적으로 결정한다”며 “세계 유수의 대학이 모두 미래를 향해 가는데 우리만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윤석만 교육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