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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바로 그거야’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마법이 시작돼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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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호 22면

 국내서 대규모 개인전 연 프랑스 그림책 작가 에르베 튈레

‘창의’는 이 시대의 화두다. 여기저기서 창의적 인재를 찾아 나서고, 누군가는 창의력이 새로운 능력이 될 것을 자신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오! 에르베 튈레 색색깔깔전’(7월 21일~10월 21일)은 새삼 눈길이 가는 전시다. 『책놀이』『그림자놀이』등 베스트셀러 그림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에르베 튈레(Herv<00E9> Tullet·60)의 개인전인데, 여기서 내세우는 것도 바로 창의성이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창작을 즐거워하도록 변화시켰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처럼, 전시 전체가 자유로운 상상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림책만이 아닌 순수 회화, 조형 설치, 일러스트레이션 등 그의 작품 인생을 담은 50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오프닝 하루 전날 만난 그는 “우리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예술 감성과 창의성을 스스로 깨워보라”고 귀띔했다.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게 내 역할”

괴짜 혹은 장난꾸러기 어른이 아닐까 싶었지만, 곱슬 은발의 작가는 시종일관 진지했고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 이야기가 나올 때만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어린이들의 창의적 본능과 내재한 능력을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작업실 밖에서 작업하는 일이 허다하다.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유명 미술관부터 아프리카 학교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어린이들과 창의 워크숍을 진행해 왔다. 오케스트라처럼 수십 수백명의 어린이가 그의 지휘에 맞춰 낙서하고 그리며 몰입의 즐거움을 맛보는 자리다. 지난달에는 사흘간 한국 어린이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했고, 함께 완성한 작품을 전시장에도 내놨다.

창의 예술가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창의 예술을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나.
“아주 특별한 찰나의 순간. ‘이런 게 마술인가’ 싶은 순간을 맛보게 해주는 거다. 창의 워크숍을 하려고 아이들이 모이면 모든 게 백지상태다. 우리가 뭘 할 건지 그들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평등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제약 없이 아이디어를 툭툭 던진다. 그러다 모두가 ‘바로 그거야!’ 하는 제안이 나온다.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 믿을 수 없는 걸 만들기 시작하고 성공하게 될 거라는 예감을 한다. 점점 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서 말이다. 그 순간을 이끌어내는 게 창의 예술가인 나의 몫이요, 내 미션이다.”  
그 순간을 기다려주기란 쉽지 않다.  
“맞다. 내가 남들과 좀 다르다는 걸 안다. 이상한 말이지만 어른이 돼서도 난 여전히 어른보다 아이들과 있는 게 더 편하고 좋다. 실제 어른들을 피한 적도 있고(웃음). 난 애들이 하는 정신없는 행동들이 거슬리지 않는다. 테이블로 뛰어든다거나 막 떠들어도 전혀 말릴 생각이 없다. 그 순간 내가 뭔가 바로잡아야겠다 라는 의지도 없다. 그냥 오케이다. 나도 그들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될 뿐이다. 아주 간단한 가이드라인을 주고 지켜보면 어느새 분위기가 정리된다. 아이들은 믿어줄수록 책임감이 생긴다.”  
아이들만의 특징인가.  
“아니라는 걸 경험한 적이 있다. 최근 어른들을 대상으로 컨퍼런스를 한 적이 있다. 10분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적의 상태를 유지했는데, 그 ‘무위’가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내더라. 내가 조용하게 있으니 다른 참가자들끼리 말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나한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컨퍼런스를 진행했더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웠다. 끝나고 나서도 질문이 넘쳐날 정도였고, 자기네들끼리 다음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같다. 뭔가 하려 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놀라운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보통의 어른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유년 시절이 남달랐을 것 같다.  
“전쟁(1954~62년 프랑스와 알제리)이 끝나고 컸지만 뭔가 늘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고 싸늘함을 느끼고 살았다. 부모님은 바빴고 유년 시절은 지루했다.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지겨움이 나의 창의력을 만들었던 거 같다. 애들에게는 아무것도 안 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렇게 쌓인 창의력이 밖으로 표출된 건 17살이 넘어서였다. 열정적인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어느 날 초현실주의에 관심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셨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난 번쩍 손을 들었고, 그때부터 시·연극·회화 등 초현실주의와 관련된 작가들에 빠져들었다.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모험을 하는 이들에게 금세 매료됐다. 나는 늘 뭔가 새로운 걸 찾아내려고 하는데, 그때가 시작점이었다.”  

자녀에게 읽혀주고픈 그림책 없었던 게 시작

튈레는 광고 아트 디렉터로 10년간 일했다. 91년 르몽드와 유명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면서 에르메스 같은 상업 브랜드와 협업을 하기도 했다. 어린이 책과 인연을 맺은 건 1994년, 자신의 아이들에게 읽혀 줄 책이 마땅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전업’은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지금껏 발표한 작품만 50여 권. 『혼동하지 마요』로 98년 볼로냐 아동도서전논픽션부문을 수상했고, 2010년 내놓은 『책놀이』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38주간 머무르며 30개국에서 2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인기의 비결은 분명했다. 눈이 아닌 손과 오감으로 읽는 책이었다. 가령 ‘물감을 섞으려 해. 책을 좀 흔들어 줄래?’ ‘비밀번호가 필요해. 번호판을 눌러줘’에 맞춰 아이가 따라 하면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똑같은 그림이지만 색은 변해있고, 문은 열려있는 식이다. 스스로 ‘마술’을 성공시킨 아이들은 책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림책을 직접 만들려고 할 만큼 불만인 부분이 뭐였나.  
“그때도 몇몇 유명한 어린이 책이 있었다. 브루노 무나리, 토미 웅거러 같은 화가들의 그림이 들어있는 책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단정적이라는 게 별로였다. 서점 코너나 광고를 봐도 귀여운 캐릭터만 내세우기에 바빴다. 마케팅하느라 아이들의 창의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거였다. 그건 아이가 스스로도 몰랐던 비밀의 문을 열 기회를 아예 막아버리는 일이다.”
이전에 없던 그림책이라 출판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행운아라는 게 바로 그 부분이다. 출판사가 나를 완벽하게 믿어줬고 다른 방식을 존중해줬다. 뭔가 새로운 것, 남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했다. 여기에 검은색이 안 되고, 저기에는 노란색을 넣으라는 식의 지시가 전혀 없었다. 아이들과 관련한 무슨 경험이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출판사는 작가에게 일종의 첫 번째 필터인데, 완벽하게 자유를 줬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공을 했고 볼로냐에서도 상을 탔다. 이후에는 내가 뭘 느끼느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더 제대로 작업할 수 있었다. 믿어주는 만큼 흥미와 책임감을 느끼는 아이들의 마음을 나도 그때 느꼈다.”  
에르베 튈레의 설치 작품들. 마치 찢어지고 낙서한 듯한 종이 조각들로 완성됐다.

에르베 튈레의 설치 작품들. 마치 찢어지고 낙서한 듯한 종이 조각들로 완성됐다.

뭔가 얻어가려 하지 말고 어른이든 아이든 그냥 놀아라. 스스로의 감정을 놓치지 말고 그대로 느껴라. 창의력은 돈을 들여 가르치는 게 아니다.

외눈을 특징으로 하는 에르베 튈레의 대표 캐릭터 툴루투투 (turlututu)

외눈을 특징으로 하는 에르베 튈레의 대표 캐릭터 툴루투투 (turlututu)

책은 물론 전시작마다 컬러가 두드러진다. 화려한 색은 창의력에 있어 핵심 요소인가.  
“아니, 전혀. 색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가령 검은 동그라미를 문지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같은 자리에 초록 동그라미가 나타난다. 마치 내가 바꾼 것처럼 말이다. 컬러는 이런 즐거움, 놀라움을 발견하는 도구일 뿐이다. 오히려 이번 전시에서는 색이 너무 화려해서 미적으로만 보일까 봐 조심한 부분이 있다.”  

쓰레기도 예술이 된다, 에너지가 투영됐다면 

“아름답게만 보일까 봐 걱정”이라는 말은 기우였다. 전시장에서 가장 북적대는 곳은 색색깔 종잇조각이 수북이 쌓여 있는 체험 세션이었다. 얼핏 쓰레기 더미 같은 종이 조각들을 관람객들은 부지런히 붙였다. 종이 조각으로 다양한 설치 작품을 만든 ‘작품 숲’ 세션은 카메라 셔터가 가장 많이 눌리는 공간이 됐다.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 종이 조각 모두가 작품”이라고 그는 설명을 보탰다.

지난 7월 한국 어린이들과 함께 한 창의 워크숍

지난 7월 한국 어린이들과 함께 한 창의 워크숍

관람객이 마음껏 색칠하고 붙여 놓은 종이 조각들

관람객이 마음껏 색칠하고 붙여 놓은 종이 조각들

종이 조각들을 예술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모든 작업은 합치면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그리기를 15개 한다고 치자. 아이디어나 감정이 시시각각 다르게 그림에 반영될 거다. 그 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르는데, 그렇다고 나머지를 버리지 않는다. 아름다움보다 내면 에너지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나중에 보면 다른 그림이 더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종이 조각 하나가 지금은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다가 꺼내 보면 ‘이게 딱 어울리네’라며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쓰레기’를 사랑한다. 작업실도 그래서 지저분하다. 의도적인 그림보다 순간의 에너지가 투영된 진실한 그림들을 좋아한다.”  
전시에 오는 부모들에게 하고픈 말은.  
“뭔가 얻어가려 하지 말고 어른이든 아이든 그냥 놀아라. 스스로의 감정을 놓치지 말고 그대로 느껴라. 창의력은 돈을 들여 가르치는 게 아니다. 가령 나는 애들이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애들은 당연히 싫어했고 늘어져 있고 싶어 했지만 말이다. 그때 늘 했던 말이 ‘나가면 뭔가 일어날 거야’였다. 내 말은 맞았다. 더 심한 폭우를 맞기도했고, 쌍둥이 같은 돌을 주워오기도 했고,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오래 남는다.”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미국 워크숍 때 한 소년이 와서는 ‘당신이 진짜 아티스트야’라고 하더라. 잊을 수가 없다. 종종 아이들과 아무 말 없이 서로 눈을 깊게 쳐다볼 때가 있는데,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에너지를 느낀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아트센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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